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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정 Jun 11. 2024

지브리 캐릭터 분석: 모노노케 히메 MBTI

사나운 투쟁 본능 뒤에 감춘 연약한 마음

미야자키 하야요의 전성기의 시쟉을 알리는 걸작, <모노노케 히메(1997)> 캐릭터 분석의 마지막 편이다. 주인공은 바로 원령공주 '산'


모노노케 히메의 성격 유형을 분석해 보자.



오늘 분석의 대상은 작품의 제목 ‘모노노케 히메’가 가리키는 바로 그 ‘모노노케 히메’ 자신이다. 등장인물 중 에보시 고젠은 그녀를 가리켜 ‘들개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 계집’이라고 지칭했었다. 과거 숲을 침입한 인간들이 도망치며 내던진 갓난아이를 들개 신 모로가 거둬들여 딸로 키워냈다.


모노노케 히메(이하 ‘산’으로 통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전투에 임하는 인물이다. 들개 가족과 그 터전인 숲을 사랑하며, 사슴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자신의 연약한 감정도 드러내는 보드라운 심성의 소유자. 하지만 숲의 세계를 위협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적대시한다.


산의 성격유형은 무엇일까?

–여러 의견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중 ISFP설, ISTP설, ESTJ설이 유력한 주장들. 나는 그녀가 ISFP라는 쪽인데 이게 다수설이기도 하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혈혈단신 인간 마을에 뛰어들어 에보시와 격돌하는 산


ISTP설

산을 ISTP라고 보는 견해 대부분은 ‘감정이 억제’된 듯한 그녀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시타카와의 첫 만남에서 무뚝뚝하게 “꺼져”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아시타카에게 마음이 흔들리자 공격성을 드러내며 감정을 감추는 행동, 애정-배신감-분노 사이를 과격하게 오가는 언행 등을 T의 증거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감정을 숨기거나 공격성으로 가장하는 행동은 오히려 감정에 진솔하게 ‘반응’하는 증거로 본다. (내 의견을 미리 당겨오자면) ISFP는 감정 1번형으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게 곧 감정 표현의 세련됨을 뜻하지는 않는다. Fi에는 사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 있다.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우아하게) 감정을 소통하는 건 오히려 Fe의 특징이다.


감정의 내용이 뜻밖이라 순간 놀라긴 했어도 산은 그런 감정들 하나하나를 소화해서 다음 장면에서는 착실히 태도에 반영한다. 그녀의 공격성이 감정 자체에 지레 겁을 먹은 T계열특유의 거부 반응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녀가 야생 인간임을 감안하자. ‘너는 아름다워’와 같은 말을 들으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숲을 파괴한 주적 에보시에게 관용을 베푸는 아시타카의 의로운 제스처가 그녀에게는 배신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돌변해서 아시타카의 가슴팍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것이다. 산은 자신의 본능과 인간의 도덕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산은 아시타카가 준 흑요석 단검 목걸이로 그의 가슴을 찌른다


그녀는 단지 언어를 통한 감정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하지 않을 뿐이다. 늑대들과 살아왔으므로. 하지만 어머니 모로의 털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장면, 어머니의 상처에서 감염된 피를 입으로 빨아내는 모습, 가족과 숲의 구성원들에게 보이는 애착, 피아 식별이 잘되는 특징(선악 판단과 주적 관념) 등은 모두 Fi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화된 Fi보다는 신체화된 Fi에 가깝다.


ISTP 설의 근거 중에는 “무기를 잘 다루고, 현실적이고 드라이하다. 타타라 마을의 방어 태세도 파악하지 않고 일단 쳐들어 가는데 그건 현장에서의 대응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결론엔 동의하지 않지만 이 부분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특징들 - 무기를 잘 다루고, 임기응변 능력을 믿고 일단 저질러 놓고 나서 수습하는- 은 ISTP 뿐만 아니라 ISFP 유형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두 유형은 주기능만 다를 뿐 외향적 감각(Se)을 부기능으로 공유하기 때문이다. 모두 현장 장악과 임기응변은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유형들이다. 그리고 ISFP는 감정형이지만 바운더리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드라이하다.


나의 입장: <원령공주는 ISFP>

내 생각은 다수설과 같다. 이쯤에서 ISFP 유형의 특징을 한번 소환해 보는 게 유익할 것 같다.

강한 개인의 내적 윤리를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유분방하며 적응력이 뛰어나다.

일정이나 업무 방식이 타이트하게 짜인 환경을 갑갑해한다.

자신의 적응력과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는 업무 환경을 선호.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해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미의식이 뛰어나고 트렌드에 예민한 편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심.

현재의 경험에 집중해 살아간다.

지나치게 관념적/사변적인 것에는 흥미가 없다.

유연하고 여유로운 성격.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위기를 타개해 가는 경향이 있다.


ISFP는 내적으로 풍부하고 강렬한 감정 생활을 하는 유형. 감정을 세밀하게 느끼고 복합감정 또한 잘 다룬다. 하지만 산은 인간과 어울려 성장하지 않았고 나이도 어려서인지 좀 미숙해 보이긴 한다. 그렇지만 앞서 논한대로 그녀는 Fi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ISFP유형들은 ‘선 밖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보드라운 면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을 T유형으로 오인하는 일도 많다. 형제 유형인 INFP에 비해 훨씬 ‘현실’에 맞닿아 있고 행동지향적이어서 의외로 씩씩한 것 또한 ISFP의 특징. 그래서 더욱 내향적 감정인인 것을 알아채기는 어렵다.  


원령공주는 ‘잔다르크의 야생 늑대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믿는 바,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한다. 그녀에게 타협은 선택지가 아니다. 타협은 곧 변절이다. 아시타카란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다. 영화가 전개되는 고작 며칠의 기간 동안에 그녀는 자신의 복합 감정을 세밀하게 분별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장족의 발전을 이룬다. 산은 ISFP다.


<산=ESTJ> 설

솔직히 "산이 ESTJ"라는 주장은 좀 신선했다. ISTP설보다 오히려 더 그럴듯했다. ISFP는 Fi-Te 축에서 , ESTJ는 Te-Fi의 중심축에서 살아간다. 뒤집힌 거울 이미지인 셈이니 ESTJ로 보는 게 아주 엇나간 건 아니라고 생각해 찬찬히 읽어 봤다. 아래는 링크.


https://geekymythology.wordpress.com/2020/09/04/women-of-studio-ghibli-and-their-mbti-type/


이 글에서 제일 타당성 있는 부분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산은 목적의식이 강하고, 업무에 헌신적이며, 타협을 모른다. 거센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원칙을 고수한다. 포기를 모르는 군인 정신(투쟁과 봉사심이 아닐까)이 돋보이는 그녀는 ESTJ의 특징을 갖고 있다.

확실히 산은 터널 비전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그걸 Te 특유의 체계적 추진력이나 목표 완수에 대한 사명감으로 읽는 것은 억지스럽다. 산의 투철한 의지력은 외부세력에 대항해 가족의 생명과 땅을 지키려는 본능적 마음(Fi)이 그 추진력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위 글은 산이 뛰어난 병사임을 근거로 ESTJ라고 판단한다. ESTJ유형이 군대에서 승승장구할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ESTJ의 군인적 자질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가까운 사고, 조직적 추진력, (감정을 연루시키지 않는) 깔끔한 상명하복 스타일 등 현대 군대의 시스템적인 면과 상통하는 것이지 ‘군인’의 인간적 덕목과는 거리가 있다. 산이 뛰어난 무인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탁월함은 Se 특유의 감각적 현실 적응력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싸움을 귀신 같이 잘하는 것일 뿐 군대의 합리적 조직 문화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다.


글쓴이는 산이 영화 후반, 아시타카를 찌른 것을 두고 ‘사슴신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분노라고 주장하고 있다. 확실히 ESTJ는 상식과 계약을 중시하며, 비지니스 약속을 1분이라도 어기면 괘씸해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틀린 말이다. 그녀는 자기 사람인 줄 알았던 아시타카가 숲을 파괴한 적, 에보시를 구해주자 깊은 배신감을 느껴 아시타카를 찔렀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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