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연초가 되면 사업계획, 성과 목표 등의 용어가 난무하고 그걸 준비하는 이들의 입에서는 작년과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언제까지 올라가기만 해”, “이건 죽으라는 거지”, 그리고 빠지지 않고 “지가 한 번 해 봐”로 마무리되는 푸념의 뫼비우스. 근데 재미 있는 건 결국 그걸 준비하고 일 년 내내 그걸 달성하려고 뛰어다닌다는 것이다. 나도 근 30여 년째 이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마도 운이 좋다면 그 쳇바퀴를 몇 년은 더 굴려야 할 것이다.
태어나며 주민번호로 지정되고 학번을 받고, 군번과 사번의 시기를 거쳐 102동 902호에 살다 3번 영안실에서 삶을 마감한다. 평생 숫자와 살다 숫자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 문득 대행사 초창기에 잠시 빠져들었던 감독과 영화가 생각났다. 한 동안 내 머리 속 어느 폴더에도 없었던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way) 감독의 1988년작 ‘차례로 익사시키기’(Drowning by numbers)라는 작품이다.
당시 국내 극장 상영이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고 소수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언급되는 영화여서 불법 비디오를 사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를 왜 봤고 지금도 기억할까? 일단은 영화 좀 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지적 허영심이 컸고 그에 편승한 호기심의 산물이다. 솔직히 영화를 봤지만, 그것도 여러 번,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 한 건지 당시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기억의 흐름을 타고 다시금 생각난 건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영화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고 단조롭다. 세 명의 여인(모두 이름이 ‘시시(Cissie)’임)이 각기 다른 남편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이야기이고 영화 전체에 1부터 100까지의 숫자가 순서대로 화면 속에 은밀하게 등장한다. 그렇다고 숫자가 뭐 대단한 걸 의미하고 그걸 찾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션도 아니다. 영화 해설에서 그나마 기억하는 것은 “죽음의 필연성”, 1에서 100으로 가는 흐름은 생에서 종말로 가는 불가역적 과정, 말 그대로 텍스트로 영화를 배운 정도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훌쩍 지난 지금 조금 더 대의적으로 그 영화를 본다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 때 이미 감독은 삶의 ‘의미’보다 ‘측정 가능성’이 우선되는 시대가 올 것을 말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이 이야기와 관계라는 단어로 정의됐다면 지금은 마치 하나의 “데이터 묶음”으로 여겨진다. 삶이라는 것도, KPI, 지표 등으로 점철돼 있다. 극단적으로 본다면 “나는 어떤 숫자로 평가되는가?”로 귀결된다. 심지어 하루 종일 같이하는 만보계의 걸음 수, BMI 같은 걸로 묘사되고 관계는 팔로워, 가치는 연봉이나 신용 점수로.
개인을 넘어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성과 지표, ESG 점수, 신용 등급 등. 복잡한 현실이 “관리 가능한 숫자”로 단순화된다. 조금 더 나가보면 알고리즘으로 귀착된다. 이런 시대에서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성과물”이 되고 남는 건 숫치 뿐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고 명확하다. 숫자가 빠르고 비교 가능하고 관리하기 쉽고 심지어 책임 전가의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지표가 그렇게 말한다.”는 말이 그저 수용될 수밖에 없다. 이제 숫자는 중립적인 얼굴을 한 권력으로 여겨진다.
그리너웨이는 이 시대를 이미 풍자하고 경고한 것이다. 죽음은 번호로 배열되고 인간은 목록 속 항목이 된다는 것을. 숫자 그 자체는 잔혹하지도 않고 뭐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무감각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정작 잔혹한 것은 그 숫자를 믿고 추종하는 인간들이라고. 우리는 우리의 삶이 숫자와 체계로 환원되는 시대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야기에서 지표로 바뀐 시대, 공감에서 비교로 바뀐 시대, 판단에서 계산으로 바뀐 시대, 그 안에서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도 굴린다.
정신 차려야겠다. 숫자에 둘러싸여 살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숫자가 나를 대변하려 하겠지만, 그에 끌려가거나 굴복하지는 말자고. 숫자가 내 하루를 설명해 주겠지만, 하루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고 확신하며.
나는 과연 숫자를 남기기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