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그림자

30년,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

by 토사님

2053년(38살)

장면 1: 마지막 소독약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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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진료실 – 오후

소독약 냄새가 은은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 향도 이제 사라질 것 같았다. 대기실 의자는 줄지어 있었지만, 모두 비어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가 삐딱하게 기울어 있었다.


행동

준호는 탁자 위 서류를 정리해 박스에 담았다. 청진기, 작은 가족 사진, 10년 전 개원 기념패…손끝이 사진 위에서 멈췄다. 사진 속 젊은 준호는 웃고 있었다. “…그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간호사가 문가에서 인사했다.“원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준호는 억지로 웃었다. “고생 많았어. 새로운 곳 가면 더 편할 거야.” 문이 닫히자, 공기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간판

준호는 밖으로 나가 병원 간판을 바라봤다.〈박준호 피부과〉간판 아래 나붙은 종이에는 〈폐업 안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손끝으로 간판을 쓰다듬었다.

‘이 이름으로 산 10년… 끝이구나.’


결말 이미지

준호는 마지막으로 문을 잠갔다. 철문이 닫히며 나는 소리가마치 오래된 관계가 끊어지는 소리처럼 울렸다.

“…이제 뭐 해야 하지.” 그의 목소리는 허공에 부딪혀 흩어졌다.


장면 2: 커피 향 속, 낯선 검색창


커피숍 – 오후

유리창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준호는 한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커피잔에서 김이 올랐지만, 그는 손도 대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취업 사이트 메인 페이지가 떠 있었다.


검색

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다 멈췄다. ‘의사 재취업 ’‘의료 자격 활용 가능 직종’ 검색어를 입력했지만, 대부분 “AI 진단 보조”혹은 “원격 진료 상담원” 같은 공고가 전부였다. 준호의 눈썹이 미묘하게 떨렸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가?”


낯선 단어

스크롤을 내리다 한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환경복원 코디네이터 채용〉준호는 마우스를 멈췄다. 설명란에 쓰여 있었다. “기후 복원 프로젝트 참여, 의료·환경 융합 경력자 우대” 준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결말 이미지

커피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창밖 비가 점점 굵어졌다. 준호는 화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치료뿐인데…이제 치료할 건… 사람 말고 도시인가?’


장면 3: 미래를 심는 손길


커뮤니티 센터 – 저녁

넓지 않은 강의실, 벽에는 푸른 식물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십여 명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모두 손에 작은 노트를 들고,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윤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작은 박수 소리가 번졌다.


윤서의 인사

윤서: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도시생태를 설계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도시생태 전문가가 되면 진짜 도시가 변하나요?” 윤서는 잠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변합니다. 우리가 심는 건 나무뿐 아니라 도시의 숨결 그 자체거든요.”


멘토링 시작

화면에 도시의 3D 모델이 떴다. 청년들이 손가락으로 가상 숲과 수로를 설계했다. 윤서가 다가가 조언했다. “좋아요, 이 구역은 햇빛이 부족하니 음지식물로 가볼까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덕분에 저도 진짜 제 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결말 이미지

윤서는 학생들이 설계한 가상의 푸른 도시를 바라봤다.

‘내가 가꾼 건 한 도시뿐이었지만…이제 미래 세대가 도시 전체를 키워내겠지.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살짝 펼쳤다. 마치 씨앗을 심는 듯한 손짓이었다.


장면 4: 직업 지형이 바뀌다


뉴스 스튜디오 – 저녁

앵커의 목소리가 화면을 울렸다. “오늘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국민 절반이 ‘녹색 관련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화면 하단 자막:〈녹색 직업군 – 50.2% 돌파〉


현장 인터뷰

수직농장 관리자: “예전엔 물류센터에서 일했는데, 이젠 도시에 먹거리를 직접 길러요. 제 일에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대기 정화 드론 엔지니어: “아이들 숨쉬는 공기를 지킨다는 생각에 퇴근하면서도 뿌듯해요.”

카메라 뒤로 푸른 벽면 녹화 시스템과활기찬 작업장 분위기가 스쳐갔다.


전문가 해설

환경경제학자:“30년 전만 해도 이런 변화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도시생태가 곧 국가 경쟁력이 된 거죠.”


준호 – 집 거실

준호는 노트북 화면 옆으로 뉴스 자막을 흘려보았다.〈국민 절반, 녹색 관련 직업…〉그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두드렸다가 멈췄다. 잠시, ‘환경복원 코디네이터’ 공고가 떠올랐다.

‘나도… 저쪽으로 갈 수 있을까.’


결말 이미지

뉴스 화면 속 인터뷰 청년들의 얼굴은 밝았지만, 준호의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에 묻혀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지.”


장면 5: 기계와 사람이 같은 책상을 쓴 날


정부 청사 AI 협력 센터 – 오전

통유리로 된 회의실 안, 홀로그램 화면에 커다란 문구가 떴다.〈AI-인간 협력 정책, 국가 표준화 발표〉한쪽에는 공무원과 과학자들이, 다른 한쪽에는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앉아 있었다. 로봇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정책 발표

관계자:“오늘부터 모든 주요 산업에서AI-인간 협력 프로세스가 법적 표준으로 적용됩니다. AI는 인간의 결정을 보조하고, 인간은 창의와 윤리를 담당합니다.”

홀로그램 화면에 분야별 모델이 나타났다:의료, 환경복원, 교육, 법률. 각 섹션에서 AI와 인간이 나란히 일하는 이미지가 투사되었다.


현장 반응

한 기자가 물었다. “AI가 더 뛰어난데 굳이 인간이 필요한가요?” 발표자가 대답했다. “창의력과 공감, 그리고 선택의 윤리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잠시 정적 후, 박수가 터졌다.


윤서 – 멘토링 현장

윤서는 AI 어시스턴트와 함께 청년 교육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AI가 데이터를 정리하자, 윤서는 말했다. “좋아, 그건 내가 직접 설명할게. 숲은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걸 알려줘야 하니까.” AI는 짧게 응답했다. “이해했습니다. 윤서님.”

‘기계와 사람이 함께 일하는 시대… 생각보다 따뜻할지도 몰라.’


준호 – 카페 구석 자리

준호는 태블릿으로 정책 속보를 보았다.〈AI 협력 표준화, 인간 역할 재정의〉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눈앞에 여전히 열린 채용 공고 창이 있었다.


결말 이미지

한쪽 세계는 AI와 손을 맞잡으며 더 커지고 있었고,다른 쪽 세계에서 준호는 아직 자신의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채 앉아 있었다.


장면 6: 멈춘 시계, 자라는 나무


준호 – 집 거실

박스 하나가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병원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들—청진기, 명함집, 낡은 사진. 준호는 박스를 열어 손에 청진기를 들어봤다. 차갑고, 무겁고, 이제는 필요 없는 도구 같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스탠드 불빛이 그를 반쯤만 비췄다. 태블릿 화면엔 여전히 ‘환경복원 코디네이터’ 공고가 켜져 있었지만, 손끝이 닿지 않았다.“…내가… 할 수 있을까.” 시계 초침이 천천히, 하지만 잔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윤서 – 도시 숲 산책로

윤서는 멘토링을 마친 청년 몇 명과 함께밤의 도시 숲을 걷고 있었다. 길가의 작은 태양광 조명이 잎사귀를 비췄다.한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제 길이 보여요. 저, 도시 생태 설계사가 되고 싶어요.” 윤서는 웃었다.“좋아요. 여러분이 도시를 바꿀 겁니다.”

‘내가 심은 씨앗이 이렇게 자라고 있구나.’


마지막 이미지

한 사람은 박스 안 과거의 도구를 붙잡고,한 사람은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과 걸었다. 밤하늘 아래, 같은 달빛이 두 사람을 비췄지만 한쪽은 멈춰 있었고, 다른 한쪽은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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