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고 있다. 공간과 시간을 꽉 채웠던 매미 소리가 가고 그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귀뚜라미는 아닌 것 같고...) 다른 곤충의 소리가 왔다. 매주 지인과 함께 하는 2시간 간이 등산 외에는 번듯한 외출이라고 할만한 일정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잘 적응하고 있다고 본다. 평온한 일상이다.
손주들의 어린이집 문제로 30년 전의 고민 가득한 나로 돌아간 일주일이었다. 이제는 딸이 고민석에 앉아 있고 나는 그 옆 조수석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만.
30년 전에는 어린이집이라는 제도 자체가 정착되어 있지 않아서 누가 아이를 맡아 준다고 하면 10리 밖이라도 달려가 넙죽 절할 심정이었다. 요즘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제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 같다.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이 3천 가지가 있다는 말처럼 알아서 선택해야 하는 사항들이 많아졌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들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간단하게 말해서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서비스가 달라지는 것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아이들의 보육문제는 공공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복잡해진 것 같다. 국공립이 싸면서 질이 좋고 입학이 쉽지 않다는 인터넷 리뷰를 보았다. 일단 전산망에 아이들을 올려놓고 연락을 기다린다. 과연 민영 어린이집보다 보육의 질이 좋은 지는 우리 손주들을 보내 봐야 알겠지만, 20여 년 전 늦둥이 막내아들을 구립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경험이 떠오르면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
20여 년 전 구립 어린이 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딸들 육아 전쟁으로 30대를 보내고 나는 다시 늦둥이 육아를 위한 2차 전쟁을 맞이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구청에서 모 종교재단에 운영을 위탁한 어린이 집이 생겼고 출생 전부터 등록해서 기다려야 할 만큼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서 나도 그곳에 일찌감치 줄을 섰다. 순서가 되어 입학 통지를 받았다. 또래보다 늦되는 아이인 데다 분리 불안이 심해서 어린이 집 보내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아이는 어린이 집에 가지 않고 집에 있고 싶어 했다. 약을 먹기 싫어해 약 한 번 먹이려면 레슬링을 한 판 벌여야 할 정도였는데 어느 날은 내 말을 잘 들으면 어린이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약도 잘 먹는 착한 아이라면서 순순히 약을 받아먹고 내 눈치를 보기까지 했다. 나는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규율을 배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다가 내가 데려다준 날이 어린이 집 다니고 1개월쯤 지나서였던 것 같다. 그날 아이를 들여보내고 무심히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여자 아이 한 명이 등원했는데 보육교사가 그 아이에게 보인 표정과 태도가 너무 냉정했다. 막내의 태도가 변화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어린이 집에 밀어 넣을 수 없었다.
제도가 잘 정착하려면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능력이 따라야 한다. 능력은 공인 자격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의지는 그들이 받는 대우가 적절한 지에 좌우될 텐데 아이를 돌보는 이 힘든 일에 대한 대우가 최저 임금 수준이라면 그 정착을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30년 전에는 제도가 없었고 현재는 제도는 있는데 실효성이 없다면 실효성까지 갖추기 위해 다시 30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딸의 시간과 내 시간이 겹쳐지면서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회피하는 이유까지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