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에서 목격한 풍경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3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아이가 엄마의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숏폼 영상을 보고 있었다. 15초마다 쏟아지는 자극적인 영상에 아이의 눈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2024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뇌 썩음(brain rot)'이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실상을 정확히 진단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거나 하찮은 자료를 과잉 소비한 결과 인간의 정신적·지적 상태가 퇴보하는 현상을 뜻하는 이 단어는, 마치 19세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경고했던 과도한 자극과 불필요한 정보의 범람이 현실화된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다.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즉각적인 보상에 반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바로 그 메커니즘의 중심에 있다. 본래 생존과 학습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강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 시스템이 이제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의해 악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 스크롤, 좋아요, 알림음... 이 모든 것들은 도파민을 분비시키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문제는 이런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뇌가 내성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결국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에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책 한 권을 차분히 읽거나, 친구와의 진솔한 대화, 자연 속 산책 같은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뇌가 강력한 자극에 노출되면서 중독 회로가 형성된다.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불안 세대』에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청소년 정신 건강에 미치는 해악을 경고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단순한 가설을 넘어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뇌 썩음 현상의 또 다른 문제는 우리의 사고 능력이 얕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15초짜리 영상에 익숙해진 뇌는 긴 호흡의 사고를 견디지 못한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려 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무시한 채 흑백논리에 매몰되기 쉽다.
독서 능력의 저하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 학생들의 읽기 분야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2009년 5.8%에서 2022년 14.7%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단순히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논리를 따라가는 능력 자체가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복잡한 사안을 충분히 숙의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집중력이 결여되고 단편적 정보에만 의존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면, 권위주의적이고 단순한 해결책에 쉽게 현혹될 수 있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플랫폼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이들은 우리의 관심을 최대한 오래 붙잡아두기 위해 알고리즘을 활용한다. 우리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 우리의 기존 믿음을 강화해주는 정보, 우리를 화나게 만들거나 흥분시키는 내용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편향된 정보의 거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다양한 관점을 접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기회는 줄어들고,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만 강화된다. 사회는 파편화되고, 서로 다른 현실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진다.
뇌 썩음 현상이 가져오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인간관계의 질 저하다. 디지털 기기에 빠져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면대면 상호작용의 기회는 줄어든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배워야 할 사회적 기술, 공감 능력, 갈등 해결 능력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
온라인에서의 소통은 얼굴 표정, 몸짓, 목소리 톤 같은 비언어적 신호들이 제거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감정과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 쉽다. 더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무례함과 공격성이 쉽게 표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개인 차원에서는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하루 중 일정 시간은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거나 자연 속을 걸어보자. 깊이 있는 사고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부모들은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무작정 금지하기보다는 건전한 사용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알고리즘 규제와 투명성 확보가 필요하다. 플랫폼 기업들이 어떤 기준으로 콘텐츠를 추천하는지 공개하도록 하고, 사용자들이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해야 한다.
교육 시스템도 변화해야 한다. 단순한 정보 암기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력, 미디어 리터러시, 감정 조절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민 교육이 시급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 뇌의 놀라운 점은 가소성이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습관도 바꿀 수 있고, 퇴화된 능력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스마트폰 없이도 즐겁게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자. 가족 간의 대화 시간을 늘리고, 함께 책을 읽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자. 느리더라도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습관을 기르자.
뇌 썩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맹목적 거부가 아니라 현명한 사용이다. 기술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되찾는 길이다.
지하철에서 본 그 아이가 스마트폰 대신 그림책을 읽고, 엄마와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런 풍경이 다시 일상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뇌가 썩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적 건강과 사회의 미래를 위해 행동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