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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심리스 Jul 12. 2021

네가 다치면 왜 내가 아플까?(2)

나와 아기


아이가 다치면 내가 아픈 이유 두번째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정인이 사건을 본 이후, 나는 아이가 무언가 외력으로 아프거나 다치게 되면 많은 감정이 연합되어 그것과 함께 슬픔이 몰려온다.



작은 아이가 입양되고 의붓엄마에게 췌장이 절단될 정도로 고통스럽게 맞아 죽을 동안 우리는 몰랐다.

아프다고 울 힘도 없이 물 먹을 힘도 없이 무력하게 앉아있는 CCTV영상을 보고 며칠 밤낮을 울었다.


웃는 모습이 겹쳐 마음이 끝없이 먹먹해졌다  .                                            웃음이 너무도 예쁜 정인이와 딸


 아이를 낳고 호르몬의 불균형이 와서 더욱 슬픔은 과하게 왔는데 정인이의 웃는 모습과 우리 아이가 겹쳐 보여 일주일간 아이가 울어도 울고 아이가 웃어도 울었다. 그 작은 소중한 아이가 어찌나 아팠을지 상상되어 마음이 무너졌다.



사회적인 많은 구멍들이 아이를 죽음으로 몰았고 그래서 그 죄책감은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


“우리 그 때 뭐했어? 애 제대로 안 구하고.”


사회에 대한 질타와 잘못된 제도 개선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정인아미안해 챌린지가 sns상에 가득했고

의붓 엄마에 대한 분노와 공격이 쏟아졌다.


나는 나름으로 힘을 보탠다고 진정서 한통을 써서 보냈지만 이미 의미가 있는 행위라기보다는 죄책감을 덜기위한 자기위안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많은 일들과 많은 감정들이 나를 지나갔다. 지나치는 많은 사건들과 달리 그 사건은 유독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이후 나는 유독 아이의 상처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다.

정인이에 대한 미안함과 아픔이 아이의 상처가 나타날때마다 나타나 과한 슬픔으로 나타난다.


아프다고 말을 아직 하지못해서 더 슬픈 것인지.

아픔에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여서 슬픈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상처를 보면 정인이가 생각난다.

'정인이가 이렇게 아팠겠구나.' 그 생각과 동시에 그것을 우리 아이가 느꼈을 고통에 마음이 슬퍼진다.


또 우습게도 내가 그런 학대 부모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고 위하고 누구보다 아끼지만 그 상처를 보면 혹시 나를 학대하는 부모로 보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나도 그 의붓엄마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그렇게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보이게될까 두려운 마음이 인다.




정인이 사건 이후 주위의 위기에 처한 아이를 이웃들이 감시하는 시스템이 아이를 살린다는 생각이 조금은 번진 듯하다.


한 번은, 슈퍼마켓에서 아이를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사는데, 유모차를 한 켠에 두고 아이스크림을 사는 내 모습이 이상했나보다.

(또 모성이 부족한게 티가 났나 해서 혼자 찔렸다.)


계산을 하고 나가는데 계산해주시는 어머님들이 아이구 아기 귀엽다 귀엽다 하시며 자꾸 아기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얼굴 좀 보여주세요 얼굴 좀.”


어쩌다 유모차 덮개가 얼굴을 가렸는데 아마도 그게 신경쓰이셨나보다.


귀찮아서 그냥 가려고 하는데 옆 계산대의 다른 어머님까지 이상하게


“얼굴 보여주세요 얼마나 귀엽나보자 보자 보자.”


내가 덮개를 열었고 얼굴을 들췄다.

아이가 귀엽게 자고 있었고 어머님들은 그제야 안심한 듯.


“아~~ 잘 자는 거였구나. 잘 가 ~” 

하셨다.


그렇게 하고 마트를 나왔는데 그런 행동이 어쩌면 주위의 학대받는 아이들을 발견해서 도와주려는 아주머니들의 작은 다짐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무리 학대받고 아파하는 아이도 마트는 올 것이고 그 아주머니들이 주의깊게 아이를 돌아봐준다면 학대의 손길은 끊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나는 작은 일이었음에도 감동했다. 정인이 사건 이후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돌아봐주게 되었구나 싶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물론 나 혼자의 추측이고 아주머니들은 정말 아이 얼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어쩌면 아이를 학대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도 몰려왔다.


그 상황에서 얼굴이 다친 내 아이가 있다면 나는 더 그런 사람으로 보일게 자명하기 때문에 절대 그런 일을 만들어서는 안되겠다.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그 마음도 무색하게. 내 앞에 한 순간에 얼굴이 쌍칼이 된 아이가 웃고 있으니 내 마음이 평안할 리가 없지.



아무튼 이러저러한 모든 감정이 복합적으로 밀려와 아이가 다친 상처를 어루만지며 나는 그 후로도 꽤 오래 마음이 아팠고 죄책감을 느꼈고 슬펐다.



아이가 아프게 된 건 내 허리가 아팠던 영향도 있는데

내가 아프고 >

그래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기 힘들고 >

그래서 아이가 아프게 되고 >

그래서 내가 다시 마음이 아프고.


이런 과정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결국 내가 건강해야 아가도 아프지 않겠구나 생각을 했다.

 




엄마와 딸은 뭔가 아픔까지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게

아닐까?



우리 엄마는 내가 아주 커서까지도 내가 아프면 슬퍼했다. 어느 날은 관심을 끌고 싶어서 더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픈 척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보다 더 큰 표정으로 슬퍼했던 엄마가 또 생각났다. 나는 유독 위가 약해서 많이 체했는데 내가 체하면 엄마도 밤을 새고, 엄마는 밤을 새며 내 다리에 십자가를 그렸다.


“우리 슬이 안 아프게 해주세요. 하나님”


그렇게 아파하며 십자가를 그렸던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우리 딸 안 아프게 해주세요.”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그 위안의 행위가 나에게도 필요해질 것 같다.



결국 뻔질나게 노력은 하겠지만 육아에 구멍은 반드시 날 것이고 우리 딸은 또 어디선가 다칠 것이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으니 십자가를 그리는 것 말고 다른 위안 행위를 찾아야겠다.  



아이가 아플 때 생기는 죄책감과, 걱정과, 너무나 큰 슬픔의 기억을 어느 순간에는 얹히지 않고 잘 소화해내기를 빈다.


그 때는 주부 9단처럼 엄마 9단 정도의 내공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네가 다쳐도 엄마는 아프겠지만

엄마가 그 아픔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되도록, 최대한, 가능한 한

아프지 말고 크자, 우리 딸.



오늘도 사무치게 사랑하고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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