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어렸을 때 그 의미도 생각지 않고 목청 높여 따라 불렀던, 지금도 정확히 가사가 튀어나오는 성탄절 찬송가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알고 있던 베들레헴. 크리스마스 캐롤과 카드에서 접한 베들레헴이라 동화 속 마을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곳. 지금 머무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불과 10km 떨어진 곳이다.
숙소와 아주 가까운 다마스게이트 근처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탄다. 차창 밖 풍경이 낯설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지형과 지질이다. 역시 중동은 처음이다. 메마른 흰색에 가까운 흙과 언덕이 이어진다. 언덕 위에 뻭빽이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40분간 달리니 베들레헴에 당도한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행정구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첨예한 대립을 상징하는 서안지구(West Bank)안에 있다. ‘빵집’이란 의미의 베들레헴.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던 베들레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무관하게 황량하고 척박하고 불안정해 보이지만 일단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간다. ‘예수 탄생 교회’와 ‘모유 동굴 교회’를 들어가 본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점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보게 되다니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해 봤던 일이다. 아니 사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다.
내가 베들레헴을 찾은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뱅크시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이다. 나를 설레게 하는 취미 중 하나가 그림 감상이다. 학교에서도 ‘미술관 산책반’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여러 해 동안 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보러 다녔다. 전시관만이 아니라 벽화도 보러 다녔다. 강풀 만화 거리, 이화 벽화 마을, 그래피티가 매혹적인 압구정 토끼굴 등. 그런 내가 뱅크시의 벽화를 직접 만나다니. 엄마는 예수님의 행적을 좇아가기 위해, 나는 뱅크시의 벽화를 보기 위해 이번 여행을 떠났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베들레헴 곳곳에 뱅크시 벽화가 흩어져 있어서 미리 준비해 가져간 지도를 보며 콩닥이는 마음으로 뱅크시 작품 찾기를 시작한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하트를 뿌리는 천사’. 어느 담벼락 벽돌에 그려져 있다. 그러고 나서 어느 건물 벽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꽃을 던지는 청년’을 만난다. 그리고는 버스에서 처음 내렸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반대편으로 한참 가니 ‘무장한 비둘기’가 기다리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 그림들을 이렇게 베들레헴이란 곳에 와서 직접 보게 되다니. 하나하나 그림을 발견하는 순간 기쁘고 신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그림들에 대해 미리 알지 못하고 보게 되었더라면 뱅크시의 메시지를 헤아리려고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을 텐데 하는 행복한 아쉬움도 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그림들이라 진품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누렸을 뿐이다.
베들레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를 물어본다면 그것은 분리 장벽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인 베들레헴에 대한 분리 정책의 일환으로 2005년부터 세우기 시작했다는 이 장벽은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조물일 것이다. 아랍인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설치했다는 장벽.
엄마와 나는 그 장벽에 그려진 그림들과 글들을 한참 동안 고개를 쳐들고 본다. 그때 마침 후드티를 입고 있는 한 청년이 우리 눈앞에서 스텐실 작업을 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품 하나를 남기고 그는 사라진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뭘까?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입에 수화기를 대고 무언가 애써 말을 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한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고 있는 전화선은 철조망이다. 두 세상의 불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자신들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상대편을 비난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나의 눈을 끈 또 하나의 스텐실 작품은 한반도 지도.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북한과 남한이 나누어져 칠해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북한도 (Not only Palestine, But also N. Korea)’라고 적혀 있다. 장벽의 시작점에서 그 기둥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트럼프도 한눈에 확 들어오는 작품이다. 복잡한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곳이다.
뱅크시의 한 작품을 아직 찾지 못했다. ‘군인을 검문하는 소녀.’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지도를 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참을 헤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그 그림은 한 상점 내부에 있었던 거다. 벽화가 밖이 아닌 실내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겨우 물어물어 찾아간 상점. 그곳은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곳이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 청년이 상점 내부의 벽에 보존되어 있는 뱅크시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뱅크시와의 만남보다는 이 청년과의 만남이 인상적이다. 그는 외지인인 우리와의 만남을 감격해 하는 듯하다. 연신 이곳을 찾아주어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뱅크시의 그래피티, 베들레헴 장벽의 스텐실, 그리고 기념품 상점의 팔레스타인 청년. 이들이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은 같다. 그것은 ‘평화’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바로 그곳 베들레헴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