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차 한국 직장인이 미국에서 인턴으로 살아남는 법
예전 언젠가 회사생활에 관해 우연히 들었던 말 중 참으로 공감이 되어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회사에 맞추던가, 회사를 떠나던가, 회사를 차리던가"
스물아홉 미국에서 새롭게 뿌리내리기로 한 내게는 첫 번째 옵션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스물다섯의 나와 스물아홉의 나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스물아홉, 미국에서만 두 번째 인턴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철저히 맞추기로 했다.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나도 모르게 생긴 '안다는 섣부른 생각'과 '얄팍한 자존심'은 출국 전 이미 한국에 버려두고 왔다. 마치 시스템을 재부팅하기 위해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렇게 본격적인 미국 생존기가 시작되었다.
스물아홉, 두 번째 미국이 시작되었다.
나의 미국은 스물다섯엔 뉴욕, 스물아홉엔 캘리포니아였다. 대학생 때 뉴욕에서의 기억이 워낙 좋았었기에 다시 뉴욕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와 직무 포지션을 정하는 과정에서 선택의 폭과 기회가 캘리포니아에 더욱 많았다. 서부는 가본 적이 없었기에 이참에 미국 서부를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캘리포니아를 택했다. 스물다섯이었던 4년 전과 비교해 미국의 도시는 달라졌지만 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나의 신분이었다. "인턴".
스물다섯에도 인턴, 스물아홉에도 인턴이었다. 여전히 미국에서 나는 '인턴'이었다. 한국에서 2년 3개월 간의 직장생활을 통한 업무 경력이 있었지만 인턴 신분으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내가 발급받았던 비자는 소위 '인턴 비자'라 불리는 비자였다. 간단히 말해 기업체나 한국 정부, 대학교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문화 교류 및 관련 전공으로 실무경험을 쌓을 수 있는 비이민 비자였다.
직장인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직장생활 3년 차 정도가 되면 그간 쌓인 눈칫밥으로 기업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어리바리하던 신입의 티를 벗고 '이럴 땐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업무와 조직생활에 대한 본인만의 생각과 기준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양하게 겪으며 때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떻게 지혜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스킬도 축적된다. 이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안다는 섣부른 생각'과 '얄팍한 자존심'의 싹이 튼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다시 오며 한국에서의 경력, 직위, 월급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대학생 및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사람들과 함께 '인턴'이라는 동일한 이름표를 달고 똑같은 조건과 위치에서 시작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최저시급이 12불이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당 12불, 최저시급을 받으며 미국에서 두 번째 인턴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라인 리테일 패션 회사의 MD로 근무할 당시, 옷을 직접 보고 만지며 일하고 싶었던 내게는 늘 커리어적인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미국에서 일하게 된 회사는 직접 옷을 디자인하고 제조해 판매까지 하는 Wholesales(도매) 여성의류 회사였다. 옷을 마음껏 보고 만지며 일을 할 수 있었다. 회사 제품의 주요 타깃은 남미인, 흑인이었다. 글리터, 비즈, 레이스 등 한국 패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다채로운 원단과 담대한 컬러를 다루었기에 디자인과 다양성의 재미도 좋았다. 주요 거래처는 미국의 대형 체인 스토어와 패션 온라인 사이트였으며 회사 자체적인 오프라인 스토어도 보유하고 있었다. 원단 소싱부터 옷이 디자인되어 생산되는 과정, 그리고 최종적으로 바이어에게 판매되는 전 과정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의욕이 더 컸기에 직위가 인턴이든, 최저시급을 받든 그것은 내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인턴 동료들의 대부분은 대학생이었고 나보다 최소 3-5살 정도가 어렸지만 그것 또한 중요치 않았다.
어떤 다짐과 결심으로 돌고 돌아 다시 온 미국인가. 스물다섯의 나와 스물아홉의 나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스물다섯 때는 경험을 쌓고, 즐기면 되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스물아홉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등 떠밀어 온 것이 아닌, 내 고집으로 선택해서 온 미국이니 모든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마음가짐과 자세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스물아홉, 더 이상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엔 멋쩍고 부끄럽고 죄송한 나이였다. 시간당 12불, 최저시급이었지만 그것으로 어떻게든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한국에서는 직장인 3년 차였던 내가 스물아홉 미국에서 인턴으로 생존하기 위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처럼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있지 않은 미국에서 자동차는 필수 교통수단이다. 메트로 시스템이 비교적 잘 구축되어 있는 뉴욕에서는 굳이 차가 없어도 출퇴근하거나 생활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캘리포니아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차를 타고 이동한다. 워낙 땅이 넓기도 넓지만 건물 간 거리가 떨어져 있어 동네 마켓을 갈 때도, 약국을 갈 때도 차를 이용한다.
처음 인턴으로 왔을 당시 내게는 당연히 차가 없었다. 매일 우버(Uber)를 타고 출근했다. 당시 우버에는 비슷한 방향의 목적지를 가는 최대 3명의 탑승객과 함께 라이드를 하는 가장 저렴한 옵션이 있었다. 함께 탄 탑승객의 목적지를 들렀다 가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당연히 목적지까지 소요시간은 가장 길었다. 게다가 우버는 매일의 도로 사정과 날씨에 따라 가격과 소요시간이 천차만별이었다. 최저시급을 받는 인턴에게는 1불도 소중했기에 가장 저렴한 옵션의 우버를 타기 위해 출근하기 최소 1시간 반 전엔 집을 나섰다.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동시에 우버의 예상 시간과 가격을 체크하는 일은 나의 첫 일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회사에 출근했다. 출근시간이 8시 30분까지였는데 30분 정도 먼저 출근했다. 보통 가장 먼저 출근하시던 분은 부사장님이셨는데, 매일 그 분과 출근 순서 1, 2위를 다투었다. 고요한 아침, 가장 먼저 회사에 도착해 나만의 방식으로 남들보다 먼저 하루를 준비했다. 책상을 정리하는 작은 행위를 통해 어질러져있던 마음가짐도 함께 정돈했다. 또 매일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노트에 적고 머릿속으로 미리 떠올려 보며 마주하게 될 그날 하루를 이미지화했다. 이렇게 나만의 아침 루틴을 끝낼 즈음, 시곗바늘은 8시 20분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한 공기가 감돌던 사무실에 한 명씩, 두 명씩 사람들이 출근하는 발걸음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관계에서 인사는 기본 중에 기본이지만 생각보다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리곤 한다. 내가 상대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한국에서 경력이 있었든 간에 그 회사에서 나는 인턴으로 새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회사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먼저 인사를 했다. 당연히 처음 한 달간은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 부서도 헷갈렸지만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일단 먼저 인사를 건넸다.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사람에게 인상 찌푸릴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항상 먼저 인사한 덕분에 나는 자연스레 회사 사람들과 누구보다 쉽게 빨리 친해지며 적응할 수 있었다.
또 회사에서 업무를 하며 습득한 새로운 지식은 모두 흡수해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같은 '옷'을 다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일했던 회사와 동일했지만 회사의 업종 형태와 업무 포지션은 전혀 달랐다. 업종이 다르다 보니 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 자체부터가 다를 수밖에. 회사 업무와 방식, 모든 것이 새로웠고 공부해야 할 지식도 많았다. 업무시간에는 늘 정신없이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내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는 오랜 시간이 아니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어 나만의 복습 시간을 꼭 가졌다. 그 주간에 담당했던 업무와 새로 익힌 용어, 회사 시스템을 나만의 방식으로 노트에 정리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주말에 큰 시간을 들이지 않고 조금씩 짬을 내어 투자한 노력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서 데이터가 축적되자 나의 업무, 더 나아가 우리 팀의 업무 이해도와 처리 능력이 급속도로 빨라지는 것이었다. 작지만 꾸준한 노력은 시간이 갈수록 복리가 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됨을 그때 배웠다.
어찌 보면 사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저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하고자 했다. 성실함, 책임감, 애티튜드 같은. 그리고 무엇보다 내 페이스에 집중하며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행동과 마음가짐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1달, 3달 시간이 쌓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야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부사장님께서 갑자기 나를 부르셨다.
"만약 네가 뜻이 있다면 우리 회사가 너에게 영주권을 스폰해주고 싶다."
인턴으로 시작해 입사 6개월 차, 나는 회사에서 뜻밖의 영주권 스폰서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스물아홉 미국에 다시 오기 전까지 나는 영주권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혜택이 있으며 얼마나 받기 힘든지, 미국에 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주권 때문에 울고 웃는지 일절 몰랐다. 한국에서 평생을 나고 자란 나였기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살면서 영주권, 시민권과 같은 소위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사실 미국에 올 당시에만 해도 미국에서 평생 살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스물다섯 뉴욕에서 6개월, 스물아홉 캘리포니아에서 6개월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미국의 생활 방식이 나와 잘 맞다는 확신이 점차 들었다. 그래서 내심 속으로는 1년 6개월 간의 비자 기간이 만료된 후에도 미국에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들던 참이었다. 그런 내게 영주권 스폰서 제안을 받은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부사장님의 제안에 가슴이 두근댔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 와 부모님께 영주권 스폰 제안 소식을 전해 드렸다. 그간의 나의 노력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정말 이제 내가 미국에서 살게 되는구나 라는 생각에 여러모로 만감이 교차했다. 그날 퇴근 후, 제대로 된 테이블도 없던 월세 $650 짜리의 방한칸에서 음식과 케이크 한 조각을 사다 놓고 남자 친구와 조촐하게 함께 축하 파티를 했다.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 서른한 살, 최저시급을 받던 인턴이었던 내가 회사에서 6명의 팀을 이끄는 매니저가 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