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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창인 Apr 28. 2022

103. I like this part of Seoul

  여느 때처럼 에무에서 영화를 보고 광화문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내리막길을 쭉 걷다 보면 큰길에, 큰길을 쭉 걷다 보면 광화문역에 다다른다. 그 사이에 아마 두 개의 횡단보도가 있다. 큰길에 접한 두 블록을 잇는, 비슷한 폭과 길이의 횡단보도. 그러나 하나는 신호가 있고, 하나는 신호가 없다. 두 횡단보도를 지날 때면 늘 소소하게 궁금하다. 둘이 뭐가 다르길래.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밤 열 시의 광화문은 의외로 도로가 한적하여, 걸음을 늦출 필요가 없다. 아스팔트 한복판을 지날 때 맞은편에서 두 행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 인물의 실루엣, 그리고 두 톤의 음성이.


  남성이 말했다. I like this part of Seoul. 


  외국인의 음성이었다. 그 찰나에 우리 셋은 가장 가까웠다. 거의 한 줄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둘-하나로 갈라졌다. 나는 대답하는 여성의 음성을 들었지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른다. 그때 우리는 이미 너무 멀어졌다. 마치 클로즈업된 주인공이 중요한 대사를 뱉듯, 우리가 서로의 위치를 향해 다가갔을 때 둘은 그 한 줄만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I like this part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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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삽입절은 시간을 확장하기 때문에 주석으로 처리한다. 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에는 오직 사건만 일어났을 뿐이다. 그 전후를 생각하며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건이 끝난 뒤의 일이다.


  I like this part of Seoul. 나는 this part가 어디인지 알 턱이 없다. 어렴풋이 남성의 실루엣이 팔을 휘젓는 것을 본 듯도 하다. 그가 가리킨 영역이 신호 없는 횡단보도인지, 한밤에도 여전히 밝은 광화문의 건물들인지, 저 멀리 술집 골목에서 계승하고 있는 한국인의 흥인지. 아니면 제스처는 그저 형식적일 뿐이며, 그 순간의 밤공기 그리고 서울 냄새를 전부 일컫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한정적 용법을 사용하여 서울에 대한 호감을 나타냈으며, 그것이 왠지 이 도시에서 '남아있는' 좋은 점을 발굴하기 위한 작업처럼 들렸다는 사실이다.

  

  오늘 저녁은 지인과 함께 서촌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맛집이라고 찾아간 곳들은 죄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역시 서울은 포화 상태라며, 지인은 줄곧 주장해 오던 지론을 다시 힘주어 말했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기다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또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지인의 지론은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이것은 this part가 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쓰다가 이내 중단되었다. 열차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국 이후로 이런 감각이 너무 오랜만이라 거의 반가워질 뻔도 했다. 술에 취해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남의 어깻죽지에 팔꿈치를 기대는 이상한 자세를 취해야 할지라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 공간이니까. 나 역시 연락도 없는 카카오톡 창을 무의미하게 스크롤하며 그저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것은 또, this part가 될 수 있는가.


  두 개의 서울이 있다. 좋아하는 서울과 좋아하지 않는 서울. this part와 that part. 나는 늘 내가 몸담는 곳을 좋아했다. 도시도 나와 함께 묵묵히 살아가고 있으니까. '서울, 2018년 여름'이란 글을 썼었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소외되는 우리와 우리가 소외하는 서울"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친구와 함께 밤새 서울을 걸었던 그날을 여전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서울이 좋고, 좋아하지 않는 서울은 좋아하는 서울을 위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한정해야 할 것은 좋아하는 서울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서울. I dislike this part of Seoul.


  여기에서 나는 모순에 빠진다.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말이란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나를 드러낼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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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처럼 에무에서 영화를 보고 광화문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이었다. <녹색 광선>은 영화가 '가짜'임을 숨기지 않고, 그 '가짜'가 어떻게 삶이라는 '진짜'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늘 그렇듯 두 개가 있다. 진짜와 가짜. 여느 때처럼 에무에서 가짜를 보고, 다시 진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오랜만에 진짜 일어난 일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글은 결국 가짜가 되었다. 2018년 여름의 서울에 대해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이제 가짜를 사랑할 줄 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사랑을 할 줄 안다. 그것이 아마 스물이 넘은 이후로 내가 얻은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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