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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금 여기

23. 목욕탕에서

"다 발가벗겨질 이름 하나"

by 백창인

아침 여덟 시 김동률의 노래가 시끄럽게 울렸다. 좋아하는 곡이라 알람으로 맞춰놨는데 이제는 가장 싫어하는 노래가 돼버렸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입던 옷에 외투만 대충 걸치고 집을 나왔다.


목욕탕이다. 옷을 훌렁 벗고 문을 열자 뜨거운 김이 훅 끼쳤다. 기분이 좋다. 탕은 온탕, 열탕, 냉탕 세 개뿐이다. 그 옆으로는 때밀이 침대 두 개와 작은 건식 사우나 방이 있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열탕에 몸을 담갔다. 피부가 둔해졌는지 온탕으로는 성이 안 찬다. 몸을 푹 담그고 있으니 탕을 나눠 쓰는 아저씨들이 눈길을 준다. 고등학생 꼬마가 아침부터 뭐하고 있냐는 눈빛이다. 그렇든 말든 나는 따뜻함이 주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생각하기 참 좋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날은 같이 앉아 있는 아저씨들 생각을 했다. 며칠 안 됐지만 몇몇 아저씨들은 벌써 눈에 익다. 출근길 전에 몸을 녹이려는 것일 테다. 그 아저씨들은 회사에 가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박 대리, 김 차장, 이 과장, 최 상무......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에 쓰여 있는 대로 존경을 받기도 푸대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목욕탕 안에서는 모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배불뚝이일 뿐이다. 팬티 한 장 입은 때밀이 아저씨만이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다.


내가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이름 하나 얻기 위함이라면, 목욕탕의 더운 김과 팔팔 끓는 물속에서 다 발가벗겨질 이름 하나 새기기 위함이라면. 머리가 핑 돌아 탕을 나왔다.


15.03.28. 씀

17.06.06.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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