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남겨야 한다"
밤 열두 시. 차갑고 어두운 공기를 데리고 잿빛 대문을 연다. 적당한 온기가 나를 감싸며 반긴다. 나는 독한 냄새를 맡는다. 거실에서 타고 있는 양초가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때문이다. 불이 모두 꺼져 있어 깜깜한 복도를 걷자 양초가 작지만 환한 빛을 내고 있다. 노란빛이다.
엄마는 양초를 켜 놓은 채로 잠이 들었다. 아담한 유리병 안에 짙은 녹색 파라핀이 가득 찬, 그 위에 조그만 나무 심지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양이다. 고급져 보이지만 반쯤 탄 양초는 흉측하다. 유리병 둘레로 타다 남은 파라핀 자국들이 더덕더덕 붙고, 심지 밑으로는 촛농이 녹아서 흥건히 강을 만드는 것이다. 색깔은 하필 짙은 녹색이라 흡사 아마존의 늪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보이는 것 위에 냄새가 한 술 더 뜬다. 엄마는 탈취를 위해 쓴다지만 겨를 똥으로 덮는 격이다. 무거운 냄새 분자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겹겹이 쌓이는 듯하다. 냄새는 흐르고 흘러서 대문 앞까지, 그리고 거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내 방에도 불쑥 발을 내민다.
유리병의 뚜껑을 덮어버린다. 환했던 불꽃이 빠르지만 부드럽게 꺼진다. 어둠은 정적을 몰고 내 어깨 위로 무겁게 주저앉는다. 불현듯 무서워져 부엌 불을 켰다. 동시에 아빠의 요란한 코 고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그래, 전등이 양초보다야 낫다. 파라핀을 묻히지도 않고, 징그러운 강을 만들지도 않는다. 뜨겁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물 한 컵을 마시고 부엌 불을 끄니 또 다시 완벽한 어둠. 벽을 더듬어 긴 복도를 따라 화장실로 향한다.
얼굴에 물만 묻히고 방으로 와 불을 켠다. 집을 나갈 때 있던 나의 것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정지된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은 나뿐이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목도리를 푼다. 스웨터를 벗고 꽉 끼는 검정 진바지도 벗는다. 시원하다. 속옷만 입은 채로 방 안을 생각 없이 배회하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눕는다. 불 끄는 것을 까먹어 몸뚱이를 다시 일으켜 스위치를 누른다. 또 한 번 완전한 어둠. 늘 그랬듯이 살짝 겁이 나서 핸드폰을 켠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다. 화면을 뒤적이다 딱히 할 게 없어서 핸드폰을 끄고 이불을 덮는다.
가장 어두운 때에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 나는 지금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하루를 반성하는 시간이다. 일산에서 대치동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영단어를 암기하거나, 흐린 눈으로 사람들의 신발을 응시한다. 글쓰기 학원은 교실이 좁다. 답답한 공기 속에서 나는 열심히 눈을 굴리고 손을 놀린다. 컵라면을 먹고 토론 수업을 받는다. 이번에는 입을 열심히 놀린다. 정신없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말하고 하면 어느새 열 시다. 내가 타는 열차가 그날의 막차가 된다. 나는 또 사람들의 신발을 쳐다보거나, 녹초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회사원들에 눈길을 준다.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기려는 찰나, 양초 냄새가 눅진하게 퍼진다. 아까 불을 껐는데 아직까지 향이 남아있다. 이제는 애증의 관계가 되어버린 냄새를 나는 그대로 맡는다.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가장 어두운 순간은 아니지만 나는 생각을 계속한다. 그 전과는 조금 다른 생각이다. 나는 심지 위에서 외롭게 타오르던 불꽃을 기억한다. 내가 불꽃을 껐을 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사라졌다. 마치 불꽃이 심지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것은 빠르지만 매우 느린 순간이다. 전등의 꺼짐, 핸드폰의 꺼짐과는 완전히 다른 소멸이다. 양초의 꺼짐은 여운을 준다. 소리는 없지만 울림이 있다. 왜 그런가 하니 양초는 흔적을 남긴다. 자신이 방금 전에 탔고, 어제도 탔고, 그제도 탔으며, 며칠 전에도 탔음을 군데군데 붙은 파라핀 자국과 진한 냄새로 알린다. 전등과 핸드폰은 켜져 있는 순간만을 비춘다. 그런데 양초는, 불꽃은 켜져 있는 시간과 켜져 있던 시간, 꺼져 있던 시간까지도 빛을 낸다. 그 덕에 양초는 내일마저 밝게 비춘다.
나는 언제나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데 급급했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왕도라고 굳게 믿었다. 참 우스운 일이다. 길을 걸을 때도 땅만 보면 부딪히기 십상인데, 아직까지 머리를 박아본 적이 없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전등처럼, 핸드폰처럼 켜진 순간에만 발광을 하고 꺼진 동안에는 죽어 있었다. 나는 어제를 생각해 본다.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지난 16년 간의 나는 죽었고, 하루살이 같은 삶을 반복하는 지금의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부드럽게 꺼졌다 다시 움츠린 꽃잎을 펴는 불꽃에서, 나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았다.
흔적을 남겨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양초의 독한 향에 마취라도 된 듯이 나는 정신이 혼미하게 잠이 들었다.
15.01.25. 씀
17.07.10. 다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