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완성될 나의 점묘화

점과 점은 이어지고 있었다

by 빨간망토 채채

03. 먼 훗날 완성될 나의 점묘화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내가 어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모임들이나 음악 관련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는지를 질문받았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와 같은 대답을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믿음은 막연하거나 단순히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되돌아보니 벅스 뮤직PD로서 다양한 플레이리스트로 사람들과 소통, 소규모 비대면 음악 모임, 문토에서의 원데이 음악 모임과 사람들을 연결 등의 스몰 석세스(small success)가 있었다. 즉, 근거 있는 믿음이었다는 말이고 그 점들을 찍어가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의 부분도 알게 되었다.


잃어버린 것들은 전부 새 걸로 오지
생각보다 어렵던 일에 좌절하고 말았지
난 뭔데 이게 어렵나
꺼지라고 그냥 저 멀리
(...)
가끔 발목이 무거웠네
차라리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이건 다 삶의 점 일 뿐이야
먼 훗날 완성되겠지 나의 점묘화

- 경제환, 점


음악과 관련된 나의 주요 활동, 지점들을 정리해 보자면 대략 아래와 같다.

대학생활: 취미 밴드, 자작곡 작업, 오픈 마이크 참여, 1년 휴학하고 싱어송라이터의 꿈을 꾸었음 - 보컬 및 재즈피아노 레슨 수강, 유재하가요제 서류탈락 2번,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첫 학기 때 <음악치료학 개론> 수업 수강, 2학년 때는 <기초음악이론>을 수강하며 음대를 기웃거림

취준생: 눈물의 시절을 음악으로 버텨냄(?), 홈 레코딩으로 작업한 자작곡 디지털 싱글 발매

직장생활: 작곡 레슨 수강하며 다시 자작곡 작업, 음악 글쓰기 수업 수강, 작사 아카데미 (비대면) 수강 - 했으나 중간에 그만 둠, 벅스 뮤직PD 활동하며 플레이리스트 선곡, 빌라선샤인의 '뉴먼소셜클럽'으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커뮤니티 기획 및 진행, 문토 음악 관련 소셜링 기획 및 진행, 넷플연가 음악 모임 N번 기획 및 진행(이 즈음에는 사내 동호회도 조직), 브런치에 음악 글쓰기 시작, 음악 매체 필진 지원했다 서류 탈락, 플레이리스트 유튜브 시작, 음악 관련 일상 브이로그 시도, 원데이 클래스 다양하게 시도(디제잉, 베이킹, 서핑, 칵테일 만들기 등)

→ 주로 관심 있었던 영역: 음악, 영상 편집/글쓰기 등 내 콘텐츠 제작, 여행, 상담, 언어(영/일), 일(job) 탐색, 콘텐츠 전반 감상


얼른 더 잘해서 뭔가 내놓고 싶다.
그래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적어도 더 나아지겠지.





생각이 많고, 원체 하고 싶은 것도 많은 편이라 늘 개인 기록을 해두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이전 기록을 들여다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과거에 적어둔 '하고 싶은 일'인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각한 대로 산다는 게 이런 걸까.

2020년.png 2020년에 구상한 서비스 중 일부 내용


2020년에 대략적으로 플레이리스트 선곡 서비스를 구상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최근에 발견했는데, 돌이켜보면 이 일은 오래전부터 내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일이었다. 2020년에 대략의 서비스 초안을 구체화하기 이전부터도, 막연히 생각만 하던 일이다. 그래서인지 구상을 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이상할까.


그리고 이듬해에 문토가 클럽장이 있는 형태인 초기 서비스 모델이었을 때 리더에 지원하려고 쓴 글도 찾았다.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다.


*문토 리더에 지원하려고 쓴 나의 소개

안녕하세요. 언젠간 월요병이 없는 삶을 꿈꾸는 일개미입니다. 낮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에는 뮤직 PD, 글쓰기 등 열심히 딴짓할 궁리를 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을 벌이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것'을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딴짓 중의 하나는 ‘벅스 뮤직PD’입니다. 격동의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은 저의 생활이라 할 만큼, 모든 순간에 있었는데요. 대학교 때에는 취미 밴드 활동을 하고, 음악 페스티벌을 즐기는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음악은 팝, R&B, 힙합, 인디, J-pop, 클래식 등 가리지 않고 듣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음악을 많이 듣다 보니 남들에게 음악을 추천해 주곤 하는데요, 나름 저격률이 높답니다. 벅스에서는 약 15개의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이외에도 브런치에 음악 관련 글을 종종 올리고 있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요. 모임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취향을 찾아주는 일 자체가 즐겁습니다. 작년 11월, 약 2개월 간 ‘빌라선샤인’이라는 커뮤니티에서 <나만의 음악 플레이리스트 만들기>라는 주제로 온라인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저 포함 6명의 멤버로 진행이 되었는데,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 하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모임을 진행하다 보니 제가 어느샌가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진행 후, 멤버들은 단순히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음악을 이전에 좋아했는지 회고해 보고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되는 시간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문토에서 모임을 진행하게 된다면,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들을 멤버들과 나누면서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운영하고 싶은 클럽 내용 프로그램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엄청나죠. 저는 좋은 음악, 특히 '좋은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으면 모두와 나누고 싶어 져요. 모임을 기획하게 된 첫 번째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음악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았거든요. 두 번째로는, 멤버들과 함께 취향을 찾아가고, 공유해 나가는 과정에서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본인의 취향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이기도 하죠. 이 모임을 통해 본인의 취향을 찾게 되고, 나만의 취향이 오롯이 담긴 단 하나뿐인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모임 소개 생략)
부디 이 모임을 통해서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아가고,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멋진 멤버들까지 얻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초년생 시기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너무 많이 했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살다가 결국 '나의 것'을 하지 못하고 일개미로 쭉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어두운 생각에도 부딪혔다. 그렇다면 하루에서 최소 8시간을 차지하는 일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나에게 맞는 직장의 조건이나 일의 성격을 탐색하는데 몰두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여행을 좋아했기에 사무실에 매여 살지 않는 외항사 승무원을 꿈꾸기도 했고. 다른 기술을 배워 진로를 틀까도 고민했다.


딜레마다.
하고 싶고 창작해 내고 이루고 싶지만,
먹고사는 그 '고마운 일' 때문에 일상만을 지켜낸다.
밖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뭘 더 하지 못한다.
그럼 이 '하고 싶은 일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분명히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대학 생활에서도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왔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는데도 취업 준비를 하면서 온갖 거절은 다 받아보며 대상포진까지 걸렸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취업이 되었지만 자아실현이라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워라밸을 추구하는지 알겠고, 취업이라는 걸로 해결이 되는 게 아니라 삶은 다시 시작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또 다른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돈을 벌다가 벌지 않으면 당장 문제가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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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사회 초년생 시기


그렇게 누구에게나 가혹할 사회 초년생 시기를 버텨내고, 3년 정도 지나니 다른 취미생활을 찾을 만큼의 여유는 되었다. 좋은 환경에서 '나만의 방'을 갖게 되면서, 또 직장과의 적당한 거리감이 확보되면서 여러모로 생활도 안정되었던 것 같고. 코로나 시기에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책을 많이 읽었고, 영화도 많이 보고, 음악도 무척이나 들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을 관통하면서, 여러 가지 분야를 찍먹 해보면서, '나는 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은 계속되었고 사실 음악과 관련된 주변부를 계속 맴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작사도 아니고(합평이 너무 끔찍했다), 작곡도 아니고(주변에 음악 활동하는 동지나 멘토가 있었더라면), 음악 평론도 아니고(어려운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았다), A&R이나 엔터회사에 취업하는 것도 아니고(워라밸이 너무 무서웠고 소규모 기획사로 가기엔 연봉이 무서웠다) 대체 어떤 형태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음악은 좋아하지만 나에게 전문성이 있을까? 란 고민도 했다. 3년 동안 한 직무에서 일했지만 주욱 전문성을 길러나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변두리를 맴돈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하지만 꾸준히 지속하는 힘이 없다고 주위에서는 말했지만, 이 모든 게 나름의 위치에서 점을 찍으며 의미가 있는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네가 이룬 것이 있든 없든 난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다만 스스로에게 너무 압박 주지 말 것. 나 자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자. 지금 마음 같아선 영어든 음악이든 뭐가 됐건 가시적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 2017년의 내가 2018년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지금 이뤄낸 것들은 과거의 내가 준 선물 같은 거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과 경험들이 쌓아 올린 나만의 점묘화는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려줬다. 기웃댔던 음악 글쓰기, 창작 활동, 2023년부터 꾸려온 음악 모임 등 모두 말이다.


음악을 추천해 주는 일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추천한 음악이 취향에 맞았다는 후기, 힘이 되었다는 말들이 그 무엇보다 뿌듯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에 있었던, 내가 음악으로 힘을 내고 치유받았기에 같은 경험을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일이란 생각을 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대학생활, 지난한 취업준비 과정을 거쳐 험난한 사회초년생 시절까지. 나를 버티게 해 준 팔 할은 음악이었다. 하루하루 지친 일상에서 음악을 부여잡고 다시 일어나고, 기대했다. 때론 그냥 흘렸다. 그리고 이런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시켜주지 않는다면]

00. Prologue
01. 벅스 뮤직PD가 되던 날
02. 그래, 이걸 해야겠어!
03. 먼 훗날 완성될 나의 점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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