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록] 인연

#단편소설

by 늘보리

✿ 제목 : 브로콜리 펀치

✿ 저자 : 이유리

✿ 출판 : 문학과지성사

4. 브로콜리 펀치.jpeg

MBTI 4가지 지표 중에서 다시 태어나야면 바꿀 수 있는 것이 "N"과 "S"라고들 한다.

확신의 S 성향(=오감으로 인식하는 성향)인 나는, N 성향(=육감으로 인식하는 성향)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넓이와 그 생각이 나아가는 속도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극도의 N 성향인 작가가 내게 들려주는 엉뚱하고 발랄한, 조금은 뚱딴지 같은 이야기였다.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됐다고?

아니, 이게 무슨 '기타가 젤리가 되는' 소리람.

(이건 한때 SNS에서 N과 S를 구분하는 질문이라며 떠돌던 밈이었다.

작가가 진짜로 이 질문을 듣는다면 곧바로 젤리가 된 통기타에 대한 소설 한 편이 뚝딱 완성될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멘탈적으로 아픔이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인건지 아니면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 장르인건지 판단이 어려워,

어느쪽이든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한 다음에야 소설을 읽기 시작했더랬다.

그래도 각 단편의 주인공들이 겪는 서사를 따라가며 왜 그런 판타지가 필요했는지 이해하게 됐고,

그러고 나니 더이상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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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 책에서, 극 S 인간의 마음에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꼭지는 두 가지이다.


[브로콜리 펀치]

: 작가가 그리는 환상이 그저 그놈의 "뇌구조가 달라서" 그런게 아니라,

내가 평소에 하는 말 또는 행동과 동일한데 여기에 깜찍한 머리핀 하나, 예쁜 머플러 하나 더 얹은 거란 걸 이해하게 된 것이 여기서부터이다.


"우리 젊었을 때도 고런 몹쓸 병이 종종 있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손가락이 강낭콩이 되고 버얼건 고추가 되고 그랬지, 응. 그게 다 마음에 짐이 커서 그런다. 누구를 미워하고 괴로워 하고 으응, 그런 나쁜 것들을 맘속에 오래 넣고 있다 보면 사람이 버틸 수가 없어져.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 ~ "
- 브로콜리 펀치


작가는 내가 보이는 것의 그 너머까지 들여다 보고 그것이 건내는 말을 듣는다.

작가의 손을 거치면 도처에 당연하게 자리한 것들도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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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아나와 나]

: 이름이 "이구아나"인 소설 속 이구아나는 주인공의 전 남자친구의 전전 여자친구의 전전전 남자친구로부터 왔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의 이전부터 전해져온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인연이 거듭되며 누군가에게 남게 되는 흔적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록 여기서 이구아나에 대한 인연은 결코 반갑지 않고 누군가에게 버려진 존재로써 시작되었지만,

소설의 주인공에겐 이 인연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는 이유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구아나가 떠나길 바라는 걸까, 떠나지 않길 바라는 걸까. 그 질문은 곱씹고 곱씹다 보면 어느새 나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계속하고 싶은 걸까, 그만두고 싶은 걸까. 계속하면 어떻게 되고 그만두면 어떻게 되나. 안으로 깊어지지도, 바깥으로 넓어지지도 못한 채 고이고 고여 단단해지는 그런 생각들을 알처럼 품다가 잠들곤 했다.
- 이구아나와 나


나에게 이 책은 이구아나다.

어떤 의미냐면, 이 책에도 여러 인연이 걸쳐있다.


이 "이구아나"는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제멋대로 떠드는 걸 좋아하는 내게,

내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게 웃으며 들어준 자상한 "그"로부터 왔다.


나에게 왔을 때 이 책은

눈에 보이는 단편으로 판단하는 2D 같은 나의 일상에 한 차원을 더 부여해

공대녀 조차도 3D로 입체적인 상상력이 가능하게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제 나는 이 책을, 만날 때마다 내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고마운 언니에게 선물해주려고 한다.

언제나 그랬듯 가장 마음에 드는 인덱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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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궁금해졌다.

그가 읽은 많은 책 중에 왜하필 이 책이 나에게 이구아나가 됐을까.


자, 이제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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