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은 조직, 사랑을 잊은 조직

by 주홍은하수

I.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습지만 내 오랜 의문이었다. 통속적인 노래가사에서, 소설에서,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영상 콘텐츠에서 사랑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표현하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정의를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나무가 그려진 그림책을 보고 나무를 배우듯, 전공책에 있는 수학적인 정의로 개념을 배우듯 사랑을 그렇게 배워본 적은 없었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노래했을 뿐. 사랑에 관한 가장 쉬운 설명은 아마도 젊은 남녀가 불현듯 빠지는 어떤 사건이나 감정이리라. 나도 젊었을 때 그 감정에 몰입한 적이 있으니 그게 무엇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 또는 동성의 성적 매력에 강렬히 자극받는 것이 과연 사랑의 전부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만난 바, ‘사랑한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는 너무나도 다양했다. 문장에서 주어는 연인을 사랑할수도 있고, 강아지를, 부모를, 친구를, 연예인을 사랑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학교, 고향, 전통, 동아리, 직업, 종교, 나아가 신적인 존재를 사랑할 수도 있었다. 정말로 사랑의 대상은 어떤 것도 가능했다. 설마하니 이들에게 모두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그것을 포함하는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것일 터였다.


생각해보면 사랑이 주어진 현상을 그저 묘사하는 말인지, 앞으로의 의지를 표명하는 말인지도 애매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할 때, 이 문장은 내가 일종의 감정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의 너에 대한 나의 행동 원리를 선언하는 것일까? 흔히 ‘사랑은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감정이라면 그 말은 성립되지 않아야 한다. 감정은 노력으로 나오는게 아니니까.


이렇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명료하지 않고, 혼탁하고 불분명한 개념이었다. 이를 타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뜻만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나이되, 그 단어가 지시하는 바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그런 단어일지 모른다. 잘난 척하는 표현으로는 기표는 하나이지만, 기의는 아주 많은 그런 '거시기' 같은 단어. 부모 자식의 가족 간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소속한 공동체 일원과의 사랑은 모두 같지 않은 감정의 내적 경로를 따르지만 어떤 유사성이 존재하므로 ‘사랑’이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다른 개념에 같은 라벨지를 붙여놓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접근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반드시 하나의 뜻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렇지만 다양한 뜻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유사한 지점을 발견해내는 작업은 여전히 필요하다. 즉, 다양한 개념을 한번에 설명해주는 합집합이 아니라, 일종의 최소공약수 같은 유사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그 유사점일테니까.


그래서 챗지피티에 물어봤다. 사랑의 정의를 알려줄수 있겠느냐고. 찬미하는 내용일랑 제쳐두고 현상을 건조하게만 기술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사랑이란, 특정 대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 정서적 유대, 선의(善意)를 유지하며, 그 대상의 안녕과 존재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때로는 자신의 자원(시간, 감정, 행동 등)을 자발적으로 투자하려는 심리적·행동적 경향성을 말한다”


이 정의를 읽은 나는, 좀 얼떨떨해졌다. 이 문장은 말하자면 내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조직에 대해 행동하기를 원하는 행동 방침 그 자체였으니까. 챗지피티가 세상 만물을 다 정의내리는 만능의 ai는 아니다만, 적어도 이 정의대로라면 구성원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속한 조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결론이 되어 버렸다.


“당신은 당신이 속한 조직을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구성원들을 사랑하십니까?”


글쎄,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위와 같은 문장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문득 고개를 들었던 아주 개인적인 의문이, 그리고 하필 그 순간 내 옆에 존재했던 챗지피티라는 툴이 나로 하여금 내 업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II.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인간에 대해 ‘호모 듀플렉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인간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생물학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이고 질서를 지키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뒤르켐이 인간 본성을 굳이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표현한 까닭은 명확하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으로 교정해야한다는 이후의 논리 전개의 밑바탕으로 쓰기 위해서다. 인간의 본성을 둘로 나누는 작업이 대개 이렇다. 인간 또는 인간의 본성을 두 그룹으로 나눈 다음, 논자가 생각하기에 부정적인 쪽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주장을 펼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형태의 주장을 파악할 때, 중요한 지점은 뒷부분의 ‘무엇을 해야하는가’ 쪽이지 인간을 그렇게 둘로 나뉘는게 타당한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유치하지만 비슷한 비유를 떠올렸던 적도 있다. 바로 조직의 구성원들을 ‘용병’과 ‘기사단’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기사단’의 기사들은 스스로의 서약과 함께 기사단에 속한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기사단의 이상과 목표 그리고 핵심가치를 위해 조직에 헌신하는 삶을 산다. ‘용병’은 반대다. 돈이 되면 뭐든지 다 한다. 돈을 더 준다면 방금까지 싸우던 곳과도 계약한다. 그리고 정확히 계약한 대로만 일을 수행하고, 계약에 쓰여져 있는 내용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비유를 떠올렸던 것은 ‘용병’의 형태로 살아가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하면 ‘기사단’의 기사들 같이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점점 용병처럼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 가고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가는데 대한 위기의식도 있었다. 기사와 용병이라는 표현에서 오는 이미지의 구도가 어쩌면 은연중에 나의 호오를 반영하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지금에 와서는 든다. 아무튼 유치하지만 그런데로 커뮤니케이션에는 효과적인 비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랑의 개념을 챗지피티로부터 듣고나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인간은 저마다 사랑하고 애착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보게 되었다. 그 대상은 개인마다 다양하다. 그리고 애착대상이 반드시 꼭 하나만 가지고 있지 않다. 가족을 사랑하면서 아이돌을 사랑할수도 있고, 연인에게 사랑을 노래하며 주말마다 좋아하는 축구팀을 응원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사람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기에 애착하는 대상에는 자연스레 서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음의 무게중심이 더 쏠리는 지점이 있다. 그렇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언젠가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결국 맞이한다. 좋아하는 팀의 결승전과 연인의 생일이 하필이면 같은 날이던가 하는 질 나쁜 장난 같은 우연들 때문에 우리는 종종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결정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행동이며, 대개 이후 본인의 삶을 크게 좌지우지하게 마련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며 사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오직 온전히 자신의 취미를 위하여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 두 사람에게 직업이란 무엇일까. 결국은 돈을 벌게 해주고, 그 돈으로 자신이 마음껏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 정도일 것이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라면, 많은 돈을 주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것도 이 두 사람에게는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일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 직장이란 오직 돈으로만 관계하는 곳이니까. 돈을 얻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으면 돈이 나오는 공간으로 매일 출퇴근 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은 이기적인가? 옛 직장의 동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단순한 이기심에 내린 결정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그 남자의 가족에게 이 남자는 전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 남자와 여자에게는 단지 본인이 가진 사랑과 애착의 무게중심이 직장보다는 가족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더 쏠렸을 뿐이다.


용병은 나쁜 사람인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고향에 있는 그의 가족을 더 잘 먹여살리고 싶었을 뿐이거나, 일전에 봐두었던 자그마한 저택을 구매하고 싶었을 뿐일지 모른다. 그것을 어떻게 나쁘다고 부를 수 있겠는가? 기사는 좋은 사람인가? 아니다. 단지 남들보다 기사단을 더 사랑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기사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기사단 외의 사람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마구잡이로 흉폭하게 다루는 나쁜 사람으로 행동할 지 모른다.


III.

이제 내가 하는 일을 좀 더 엄밀하게 벼려낸다면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 내 구성원 각각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위계에 있어서 ‘조직’의 순위를 가능한 한 높이게 만드는 것, 사랑의 무게 중심을 어떻게든 조직 쪽으로 쏠리도록 하는 것


다만 이렇게 정의할 경우, 내 작업의 경쟁 상대는 구성원의 사랑에 빠지는 요소 - 가족, 친구, 연인, 취미 등 - 들이 될 것이다. 그들보다 조직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구성원이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인 ‘자기 자신’까지도 나의 경쟁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쯤 되면 내가 하는 일에 불현듯 공포심이 든다. 그리고 “세뇌”, “가스라이팅” 같은 삿된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떠오른다. 최저임금, 임금체납 그리고 야근에 따른 번아웃, 과로사 같은 내용들이 주요한 의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이런 나의 접근 방식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다양한 블랙기업들의 과거 유사한 케이스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시도들은 모두 그 기업들의 명성을 먹칠하는데 확실히 기여했다. 왜였을까?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맨 앞에 내세우지 않고, 돈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오로지 돈을 더 적게 주기 위해 사랑과 헌신을 간판으로서 내세웠다는 사살이 너무나도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 역시 사랑으로 치환하여 보면 이해가 된다. 확실히 돈만으로 사랑을 얻어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돈을 아끼는 티를 팍팍 내면서 사랑을 얻는 것은 아마 그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돈을 아끼는 것이 이 작업의 제1원칙 또는 제1의 기대효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동종업계와 유사한 수준의 돈을 주면서도 보다 몰입할 수 있는 환경, 보다 즐겁게 업무를 보는 환경을 만들어, 효율성과 효과성을 몇 배로 만들어내는 것이 맞는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수준으로 조직에 몰입할 것까지는 없다. '이 조직을 지켜나가고 성장시키는 것이 의미있고 시도해볼만 하다' 또는 '이 조직을 지키고 싶다', '이 조직을 이렇게 쇠락하는 것은 좀 아쉽다' 정도의 마음만 남겨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현 시대에서 오직 달콤한 말로써 적은 인건비를 이해하게끔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돈은 이제 단순한 금전이나 물체가 아니며, 생명의 근원이자 능력의 상징이며 계급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가치 있는 것을 아낌 없이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돈의 가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그럼 그냥 돈을 많이 주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 말대로라면 연봉이 높을 수록 업무의 즐거움과 몰입 또한 비례해서 올라가야 할 것이다. 논의를 깔끔하게 하기 위해, 동종업계의 동종직무를 가진 인원으로 논의를 좁혀보자.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돈을 적게 버는 사람보다 어쩌면 더 일을 잘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몰입이나 헌신, 진정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그러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은 통계적인 자료를 찾아서 근거를 내세울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호소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건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많은 돈은 워크에씩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bizucafe/223907155351


위 글은 Scale AI의 CEO인 알렉산더 왕의 글을 비즈까페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왕은 인원을 채용할 때 절실함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아가 내면에 ‘불꽃’을 가진 사람을 채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런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질문 세트도 몇 가지 알려준다. 이게 맞는건지 틀린건지, 맞다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맞는 것인지 같은 논의는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미뤄두자. 다만 이 글에서 이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왕은 소위 ‘불꽃’을 선천적으로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 같고, 최소한 그것을 조직에서 후천적으로 불어넣는 작업은 불가능하거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리스키한 것으로 간주한다.


왕이 보기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바로 정확히 그 리스키한 업무다.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있고 붙이는 시도를 해보자는 것. 나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내 마음에는 불꽃이 있는가?



IV.

요즘은 의례(Ritual)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특성상 인류학과 종교학/신학에 관련한 책들을 사서 보아야 한다. 보통 뜬금없는 일이 아니다. 와이프가 종종 황당하게 나를 쳐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내가 이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개인적 관심사로 인한 공부다. 따지고 보면 이 블로그 전체가 내가 개인적 관심사로 시작해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다름 아니다.


의례를 공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조직을 사랑하게 만드려면, 조직과 개인이 만나서 소통하는 공간이 필요한데, 그 방법이 의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례가 사회적 소속감을 되찾아준다면 파편화된 업무 속에서 업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업무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지금은 그저 회사에서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다가 끄고 돌아오는 일에 반복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람이 회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해진 의자에 앉으려 가는 것에 불과하다. 조직이란 원래 추상적인 개념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상적인 것을 이렇듯 추상적인 상태로 흐릿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이렇게 조직이 희미해진 곳에서는 조직을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오직 조직에서 주는 돈 뿐이기 때문이다. 돈으로만 관계하는 사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실로 둘은 아무것도 나누지 않았다. 그냥 계약에 따라 약속을 수행했을 뿐이다.


나는 의례가 조직이라는 개념을 보다 Tangible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의례란게 별게 아니다. 예를 들면 회식이란 것도 의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환영회, 연말회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형식을 갖추지 못했고, 술에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치명적 단점 때문에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회사들은 예전처럼 회식하지 않는다. 미팅도 의례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요즘은 그래도 과거보다 미팅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스탠드 미팅, 핸즈온 미팅, 타운홀 미팅 등 다양한 곳에서 수입된 미팅들이 있다. 그러나 이름만 수입했지 내용은 수입되지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미팅이란 과거의 분기별 보고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데 그저 이름만 미팅이라고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시간 낭비로 인해 많은 생산성과 의욕이 오늘도 괴롭게 질식하고 있다.


과거의 의례들에 허례허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부수어 나가는데는 성공했다. 나도 부수는데까지는 동의한다. 그 유명한 삼성산에 올라 사과를 씹는 행동 같은 것은 실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주술 행위에 다름 아니다. 팀워크를 명분삼아 주말마다 부르는 등산 모임은 진심으로 끔찍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것은 팀워크보다는 최상위 직책자의 기분을 살려주는데만 초점이 잡혀져 있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되는 행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부순 곳에 새로운 의례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면 복권을 고려해야 할 의례도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 팀장이 된 사람과 승진한 사람에게 축하 행사를 성의껏 치뤄주면 안되는 걸까? 회사에서 정년 퇴직하는 사람에게 좀 더 예우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장기근속자에게는 사규에 정한대로의 금액을 그저 입금만 해주는 것으로 할 일을 마친 것일까? 주재원으로 몇 년간 해외에 나갈 동료에게 고기와 술을 먹이고 함께 취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할 도리를 다 한 것일까? 그것이 지금의 세대에게도 이해받을 수 있을까?


능력에 따라 보상을 조정하자는 대전제에는 도리없이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좀 더 상호간에 예의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예의가 각각의 개인기만으로서가 아니라 조직 차원에 정해져있는 예법으로서의 예의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권위를 부여한다면, 더 큰 차원으로 존중해주고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주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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