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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작가 Jan 03. 2021

대본을 쓰며 웃는 작가

극한직업 코미디 작가

1992년 여의도 MBC 안에 ‘휴거 작가’가 있었다는 말, 기억하실 거다. MBC 예능국 작가를 하며 만난 사람 중에 이 선배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PD수첩> 작가 시절 ‘휴거’ 아이템 취재로 만난 코미디 작가 이훈지(가명을 씀을 이해해주시길).


예능 작가가 하는 장르는 여러 가지가 있다. 버라이어티, 관찰, 토크, 게임, 코미디, 쇼 등등. 이중에 가장 어렵고 힘든 게 뭔가 묻는다면 난 1초도 쉬지 않고 답할 수 있다. 코미디 장르다. 예를 들어 같은 예능 작가라 할지라도 <복면가왕>, <미운우리새끼>, <무한도전>, <개그콘서트> 중에서 가장 힘든 작업을 하는 건 <개콘> 작가다.


코미디 작가는 극한직업이다. 웃겨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웃긴다는 건 직접 해보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힘든 작업이다. 남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하는 작업은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힘들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직접 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내가 웃는 건 쉽지만 남을 웃게 하는 건 어렵다는 것을. 나도 <코미디하우스> 등을 할 때 죽는 줄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을 웃기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웃겨야 한다. 자신부터가 재미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쉬운 건 아니다. 마음이 경직되어 있으면 그 어떤 생각을 해도 웃기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웃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훈지 형은 진정한 코미디 작가였다.


하나의 공간에 3개의 프로그램이 공존했던 그 시절. MBC 예능 회의실 한 공간 안에 <일밤>, <오늘은좋은날>, <웃으면복이와요>가 있었다.(<일밤>은 그 자리를 계속 지켰고 다른 두 개의 공간은 프로그램이 자주 바뀌었다.) 나는 <일밤> 회의 탁자에 앉아 약 10미터 거리에 있는 <웃복> 팀을 자주 봤다. 아니,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고개만 들면 보였고 고개를 숙여도 소리가 들렸다. 한 공간에 3개의 예능 프로그램을 하는 피디와 작가들이 모여 앉아 쉬도 때도 없이 떠들어댔다. 그 날고 기었던 작가들 피디들 중에 훈지 작가형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웃복>은 몇 개의 코너들이 있고 코너 별로 담당 작가가 있다. 작가는 메인 개념이 없었고 선배와 후배들만 있었다. 메인 피디는 한 자리에 앉아 매 코너의 작가와 개그맨들만 바뀌며 아이디어 회의를 했고 구성이 잡히면 담당 작가는 녹화를 위한 코너 대본 작업에 들어간다. 훈지 작가는 코너 회의 때 소리가 유독 컸다. 아이디어를 표현할 때도 컸고 누군가 하는 얘기에 대한 리액션도 무척 컸다.


회의가 끝나면 코너 대본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 순간부터 훈지 작가는 혼자서 키득키득 웃음을 찾지 못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저 형이 대본을 쓰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웃나 싶었다. 뭘 다른 걸 보거나 생각하나 했다. 쓰윽 훈지 형 뒤로 가본다.


타닥타닥타다다닥 탁탁 (워드프로세서 키보드 소리)

큭큭 크크큭 (웃는 소리)

타닥타다다각 타각타가가각

크흐흐흐 흐하하하


옆에서 밀접 관찰해본 결과, 훈지 형은 무슨 다른 걸 보거나 듣거나 해서 웃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대본이 너무 재미있고 웃긴 거였다.


대본을 마치면 메인 피디에게 보여준다. 그 피디도 데시벨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었다.


뭐야!!!! 대본이 이게 뭐야!!! 이게 재밌어!!!!

아니 형... 내가 볼 땐 재미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 이렇게저렇게여차저차하게 고쳐!!!!!

어 형...


메인 피디는 웃을 땐 한없이 호탕하고 흥부자지만 혼낼 때는 버럭이었다. 작가도 개그맨도 그 피디에게 소리 안 들어본 사람이 드물었다. 훈지 형은 기가 팍 죽어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곤, 몇 초 지나지도 않고 다시 시작한다.


큭큭 키득키득 으하하 웃긴다.


훈지 형 관련 에피소드 하나 더. 그날도 여지없이 작업한 대본을 두고 메인 피디에게 깨졌다. 지적사항은 분량이 길다는 것. 당장 줄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그 형은 줄였다며 다시 보여줬다. 읽어보던 메인 피디, 다시 버럭 한다.


이게 뭐야! 줄이라 그랬더니 글자 크기를 줄여!!! 이 단락 요 단락 빼!!!!


훈지 형은 잠시 후 빼라는 단락을 뺀 대본을 제출했고 겨우 통과됐다. 당시에는 작가들이 작업한 대본은 합체하여 인쇄소에 넘기면 책 형태로 제작한다. 코너 별 모든 대본이 취합됐고 인쇄소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와 가져 갔다. 그런데, 훈지 형이 슬금 눈치 보며 나가는 게 아닌가. 그 형은 자신이 덜어낸 단락을 그 직원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이거 요 부분하고 요기 사이에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깜빡 빠트렸네요. 하하하.


다음 날 인쇄된 대본이 왔고, 해당 대본을 들고 녹화 스튜디오로 간 메인 피디는 그 부분을 보고 어떤 행동을 했을까. 상상에 맡긴다.


그는 그런 코미디 작가였다. 선배였다.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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