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업이 기획을 자주 해야 하는지라, 누구라도 뭔가 대단한 기획을 했다는 얘기만 보이면 일단 관심이 간다. 이 책이 유난히 나의 관심을 끈 건, 2018년 KBS에서 방영한 <주문을 잊은 음식점>의 포맷을 기획한 사람이 저자라서다.
당시 그 프로그램이 나왔을 때, 일단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주문을 잊은 음식점? 음식점인데, 주문을 했는데, 잊는다고? 그럼 어찌 된다는 거지? (이렇게 타이틀을 보았을 때 물음표가 떠오른다면, 그 콘텐츠는 1단계를 넘었다는 얘기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이 출연한다는 정보에 콘셉트를 어느 정도 눈치채긴 했지만,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근데 방송을 보지는 못했다.)
이 책은 식당과 치매를 연결한다는 그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하고 구현까지 한 기획자가 쓴 책이라고 하니 당장 읽어야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주문을 잊은 음식점>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독일 등 세계 각 국에 판매된, 포맷으로도 성공한 기획이었다.
저자 오구니 시로는 현재는 플랫폼에 국한하지 않고 콘텐츠를 기획하는 전방위 기획자이지만, 방송 피디로 15년을 일했다. NHK 피디로 입사하여, <클로즈업 현대>, <NHK 스페셜>, <프로페셔널, 일하는 방식>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예기치 않게 들어간 직장이었고 피디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곧 재미를 느껴 피디로서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심장에 무리가 와 쓰러지면서 결국 제작부서를 떠난다. '제작을 하지 못하는 피디'가 되면서 일에 회의를 느끼지만, PR업무를 경험하게 되면서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뜬다. 제작을 하는 피디는 아니지만 '기획하는 피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세우면서, 전방위적 기획의 세계로 나아간다.
<하하호호 기획법>이 기획이라는 분야를 다룬 수많은 저자의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했던 기획의 사례들을 성공의 노하우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마치 강의하는 것 같이 풀어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공 노하우, 대박 기획을 다룬 책을 읽고 나면 느꼈던 건, '그래, 너 대단하다!'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는 없겠니?'였다. 그에 비해 이 책은 기획의 시작, 계기, 태도 등을 얘기한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문득 하고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혹시...? 하고 떠올려보는 장면들이 있다.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웃음을 터뜨리거나, 가슴 설레는 순간들을 만난다. 저자는 그걸 '원 풍경'이라고 부른다. 원 풍경을 놓치지 말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면 기획을 하고 진행을 해나가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저자가 NHK <프로페셔널, 일하는 방식>의 제작 피디로서 일할 때, 치매 어르신을 간병하는 한 전문가를 자주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치매에 대한 저자의 이미지는 온통 부정적이었다. 전문가를 알게 되고 요양원을 자주 접하면서 조금씩 인식이 바뀌어가던 어느 날의 점심시간, 요양원 구내식당에 앉은 저자의 식탁에 놓인 한 음식이 그의 삶을 바꿔놓는다.
만두였다. 전문가에게 들었던 그날 점심 메뉴는 햄버그스테이크였다. 요리는 치매 어르신들이 돌아가면서 한다. 실수로 원래 만들기로 한 음식이 아닌 전혀 다른 메뉴가 제공된 것. 저자는 순간, 말씀을 드릴까 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굳이 지적하면 그분들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았고, 만두를 못 먹는 사람도 아닌데, 햄버그스테이크가 아니면 어때,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저자는 깨닫는다. 실수라는 건 실수의 대상자가 실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실수가 아닌 게 된다는 것. 그래, 실수 좀 하면 어때! 웃으면 되지! 이 자그마한 사건(?)에서 그의 기획,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 시작된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콘셉트는 '실수했지만, 뭐 어때!'이다. 설령 실수한다 해도 그 실수를 모두가 수용하고 오히려 즐기자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콘셉트다. 만약에 같은 기획의 콘셉트를 '치매를 겪고 있는 이들이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식당'으로 했다면, 그렇게까지 대박을 내지는 못했을 거라 말한다. 메시지라는 게 아무리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전달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다.
저자는 이 기획을 제대로 하기 위해 NHK를 퇴사한다. 내부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을 거라 말한다. 여타의 전문가들과 함께 협업하여 이벤트 식당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오픈했고, 열화와 같은 반응으로 재정비 후 재차 오픈한다. 한국, 중국, 독일, 영국 등 20여 국가에서 취재 요청이 쇄도하고, 우리나라도 해당 포맷을 구매, <주문을 잊은 식당>이 방송 프로그램으로 방영되었다.
저자는 소중하게 여기는 메시지를 유형의 무언가로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확실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법을 5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기획, 표현, 실현, 전달, 태도다.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첫째는 ‘기획’입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해도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콘셉트와 재미있어할 만한 아이디어가 없으면 그들에게 닿지 않습니다. 둘째는 ‘표현’입니다. 기획 자체가 좋아도 표현 방법이 뛰어나지 못하면 애써 구상한 기획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셋째는 ‘실현’입니다. 좋은 기획을 구상했다고 해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습니다. 구상한 기획을 표현의 세계에 ‘착지’ 시키는 일입니다. 이때 동료가 중요합니다. 넷째는 ‘전달’입니다. 전달하고 싶은 상대가 있는 장소를 찾아내 그곳에 전달하기 위한 유통 경로를 명확히 설정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태도’입니다. 기획, 표현, 착지, 유통, 이 모든 요소의 과정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며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자세로 프로젝트에 임할 것인가입니다.》
다 말씀드릴 순 없고, '표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례 한 가지만 소개한다. 일본에 'CC레몬'이라는 음료수가 있다. 독특한 건 상품 이름의 알파벳 C에 가운데 줄이 그어져 있다는 것. 'CC레몬'으로 되어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해당 상품에 눈을 준 소비자는 의아해하게 된다. '뭐지? 왜 C에 줄이 그어져 있지? 인쇄가 잘못된 불량품인가?' 하지만 옆에 놓여 있는 같은 제품들에도 똑같이 줄이 그어져 있다. 궁금하여 제품을 들어 살펴보면 이런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CC레몬을 구매하시면 매출의 일부가 Cancer(암)를 고치려는 연구재단으로 기부됩니다'. 바로 <딜리트 C>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다.
기획의 시작은 한 유방암 환자와의 만남이었다. 암이라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질환'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녀의 바램에, 무어라도 해보겠다고 덜컥 말했단다. 그렇게 고민이 시작되었다. 암이라는 난공불락 같은 질환을,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고칠 수 있는 병으로 만들어보자고 힘을 합치게 할 수 있을까.
메시지는 너무도 좋지만, 기획의도는 훌륭하지만, 임팩트 있는 '표현'이 나와야 했다. 시민들이 암을 일상에서 접하고 생각하고 무언가 역할을 하러 쉽게 다가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표현. 어느 날 암센터의 한 의사가 건넨 명함에서 그는 유레카를 외치게 된다. 그 명함에는 암센터의 영문 중 Cancer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래, C를 지우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명에 C가 들어 있는 이름에 C를 지우자고 제안하는 것. CC레몬을 만드는 회사, Campus 노트 제조 기업 같은 곳에서 호응하게 되는 캠페인 <딜리트 C>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만약, 이 프로젝트의 표현이 그저 '암 없는 세상을 위한 착한 기업 프로젝트'라든가, '매출액의 일부는 암연구재단으로 기부됩니다' 정도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기획은 좋은 표현을 만나 비로소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게 된다.
<하하호호 기획법>은 제목처럼 웃음이 나오는 기획을 만들어온 저자의 분투기가 담겨 있다. 당장이라도 훔쳐오고 싶은 기가 막힌 사례가 적지 않지만 참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기획들에 저자의 생각 방식을 대입해 보련다. 조금은 다른 생각에 목마른 분들, 지금 뭔가 눈길을 끄는 행사나 이벤트를 추진해야 하는 분들, 미디어 업계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느라 밤낮없이 궁리하고 있는 선후배 동료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