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내가 미래의 동서가 될 시동생의 여자 친구를 처음으로 소개받는 날이었다. 난 갓 돌이 지난 딸아이를 맡기려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향했다. 아직 젖을 완전히 떼지 못한 딸아이는 엄마와 아빠를 보며 보챘지만 동서가 될 아가씨를 처음 만나러 가는 나로서는 윗사람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싶었고 그러기에는 아이가 방해가 되었다. 아이는 끊임없이 보챌 것이고 그런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없고 번잡한 모습을 아랫사람에게 보이기는 싫었다.
첫 아이라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던 나는 평소에도 기회만 되면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첫 아이를 키우며 쩔쩔매는 딸내미가 늘 안쓰러웠던 엄마는 틈이 날 때마다 나를 도와주러 오셨고 나는 그때마다 아무런 가책도 없이 엄마에게 딸아이를 맡기고는 꿀 같은 휴식을 즐기곤 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엄마가 교회에 가시는 날이어서 부득이하게 친정 아빠가 주로 아이를 봐주셔야 했다. 나는 아이 기저귀며 이유식이며 짐을 바리바리 싸서 아이와 함께 친정에 부려놓았다. 나는 곧 만날 시동생의 여자 친구에게 신경이 쓰여서 도대체 어떤 아가씨일까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그날따라 안색이 안 좋은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챌 수 있었을까. 딸아이를 맡기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 최대한 집에 빨리 오라고 하셨다. 나는 아이를 아버지에게 자주 맡기는 것도 아닌데 생색내는 듯한 아버지의 말투가 살짝 원망스러워 되도록 빨리 오겠다고 뜨악하게 말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시동생 커플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수더분하게 생긴 여자 친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시동생은 그저 자신의 여자 친구를 가족에게 소개하는 것이 기쁜 눈치였다. 음식점에 앉아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내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오늘 이상하게 몸이 안 좋다며 지금 바로 집으로 올 수 있냐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지금은 오래 통화를 못하니 조금 있다 다시 통화 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시동생 커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또다시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자꾸 울리는 전화가 귀찮아서 무음으로 해놓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같이 시댁에 가서 차나 한잔 하기로 하고 시댁으로 향했다. 시댁에서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차를 준비하고 과일을 깎고 있는데 이번에는 친정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신경질이 난 나는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아니 왜 자꾸 전화하는 건데?"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니 아빠가 죽었어. 심장 마비래. 빨리 병원으로 와라."
나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순간 머릿속이 빙빙 돌면서 현실감이 사라졌다. 그 이후로 시댁에는 뭐라고 말했는지 어떻게 병원으로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희미하다.
내 아버지는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이다. 내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 전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입사하여 공무원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 하숙집을 하던 과부의 딸과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하숙집 딸이었던 내 할머니는 당시에 경기고녀를 다닌 신여성이었다고. 두 분은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함흥에다 차렸는데 할아버지는 과부였던 장모님도 함흥으로 모셔와서 함께 살았단다. 그렇게 두 분은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여 남한 쪽 공무원들은 먼저 서울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내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를 원망하곤 했는데, 할아버지보다 말단이던 사람들도 이리저리 수단을 써서 자기 가족들을 다 데리고 피난을 왔는데 할아버지만 고지식하게 가족을 서울로 못 데리고 나오셨다고 했다. 일단 공무원을 다 소집한 후 학교에 모아놓고 내일이면 서울로 떠나기로 한 바로
전 날, 내 할머니는 당시 열네 살이었던 큰 아들, 바로 우리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큰아들만은 데리고 피난을 가라고 하셨단다. 아버지 말마따나 고지식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겨우 몇 달만 떨어져 있으면 되는데 왜 유난을 떨며 아이는 데려왔냐고 싫은 소리를 했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로 내 아버지를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가셨다고 했다.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서울로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서울로 피난을 왔고 그 뒤로는 다들 알다시피 남북은 분단이 되었고 두 분은 다시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할머니가 주신 짐을 풀어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사진이 들어있었다고 하니 할머니는 이 피난이 어쩌면 오래 걸리리란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둘만 서울로 내려왔고 두 분의 서울 피난살이가 시작되었다. 기약 없는 서울 살이가 길어지자 할아버지에겐 여자가 생겼고 내 아버지는 자신과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는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할아버지가 결혼한 이후로는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했다. 주로 고모네 집에서 많이 얹혀살았는데 다들 어려운 시절이라 군식구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가끔 고모부가 자신한테 인색하게 굴었다고 원망하곤 했지만 다들 제 코가 석자인데 누굴 챙기랴. 그나마 얹혀살게 해 준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천덕꾸러기가 된 내 아버지는 다행히 공부 머리는 있어서 당시 명문이던 경복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군인이 되고 싶었던 내 아버지는 육사에 지원했으나 시력이 나빠 육사에 떨어졌다. 빨리 돈을 벌고 싶었던 아버지는 차선책으로 서울대 치대에 지원해서 무난히 합격을 했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개업할 돈이 없던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파병을 하자 군의관에 지원하여 베트남에 가게 된다. 가끔 아버지는 베트남에 갔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못된 짓을 많이 했다고도 했고 미군들은 앰뷸런스가 지나가면 꼭 차를 한쪽에 대고 앰뷸런스가 먼저 지나가게 해 주는데 한국 군인들은 절대 길을 양보하지 않더라는 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벌어 온 돈으로 조그만 치과를 개업한 아버지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위암으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할아버지는 평택에 살고 계셨는데 아버지는 소식을 듣자마자 할아버지를 뵈러 평택에 가셨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상태는 그리 위독한 상황은 아니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단다. 그 후에 몇 번 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는 평택까지 먼 길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위기를 넘기셨고 아버지는 점차 할아버지의 병세에 무덤덤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고 아버지는 이번에도 별일이 없겠지 하고 느긋하게 할 일을 다 마치고 평택으로 향했고 아버지가 평택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평택에 도착한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할아버지가 아들이 좋아한다며 냉장고에 가득 넣어 둔 차가운 맥주뿐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하나뿐인 피붙이를 잃은 후 내 아버지는 치과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 중반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아버지가 안쓰러워 여기저기서 여자를 소개해 주기도 했지만 수줍음 많고 말주변도 없는 내 아버지는 쉽게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한 번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몇 번의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이 분이 바로 내 어머니인데 몇 번을 만나도 별 반응이 없는 아버지가 못내 답답했다고 한다. 진전이 없는 관계에 지친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서 헤어지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와 약속을 정했다. 약속 장소는 당시 동물원이던 창경원. 어머니는 '아니 하마 이빨이라도 쑤시려고 하나. 왜 동물원에서 만나나' 의아했지만 일단 약속을 정했으니 창경원으로 나갔다. 창경원에서 말없이 동물들을 구경한 후 두 분은 당시 칭기즈칸 요리로 유명했던 '신정'이라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러 나왔는데 마침 그 앞에 '피앙세'(약혼녀)라는 찻집이 있더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찻집 이름이 의미심장하지 않느냐면서 "부부는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히는 것"이라며 나름대로 준비한 프러포즈를 했다. 어머니는 웬 프러포즈를 하면서 죽는 이야기를 하나 짜증이 났지만 그 시절엔 노처녀인 서른둘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아버지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그래서 두 분은 결혼을 했고 아들 딸을 낳고 또 그 아들 딸을 결혼시키며 손주도 보고 행복하다면 행복하고 불행하다면 불행한, 남들처럼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남편과 헐레벌떡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엄마는 우리가 애를 맡기고 간 후에 교회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애를 보고 있었는데 자꾸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의자에 앉더니 움직이지 않아서 흔들어 봤더니 의식이 없길래 119를 불러서 병원에 왔다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날 새벽 운명하셨다. 아픈 아버지에게 애까지 떠 맡긴 나쁜 딸을 뒤에 남긴 채. 통일이 되면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나겠다는 소원을 이루지도 못한 채.
그 뒤로 삼일장을 지내고 삼우재를 지내고 49재도 지내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7년이 흘렀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다. 늘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지만 너희가 살 세상은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가는 세상이 될 거라던 내 아버지는 지금도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며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