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와 갱년기 사이

by 앞니맘

딸은 방학 두 달이 다 지나갔다고 아쉬워하며 개학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싶다고 개학을 운운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변덕이다. 둘째의 짐을 챙겨 서울에 데려다주고 와서 반신욕을 하고 나니 물이 아까워서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항상 쉬는 것과 일을 연결하는 병을 어찌 고칠지 이것도 병 같다. 3월 2일 전에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반신욕 하러 들어간 엄마가 몇 시간 체 나오지는 않고 라디오 소리와 함께 덜그럭 거리고 있으니 궁금했던 딸이 문을 열고 물었다.

"엄마 뭐 해? 청소해?"

"청소 다 했어. 너도 오랜만에 거품 목욕할래?"

개학 기념 거품 목욕을 시작했다. 긴 방학 동안 훌쩍 커버린 딸이 오랜만에 욕조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기 때 생각도 스치고 미안했던 감정들도 비누거품처럼 올라왔다.


"엄마가 상처준거 있으면 말해봐 사과할게."

그냥 장난처럼 던진 말에 딸의 반응은 의외였다. 대답이 없이 거품만 만지고 침묵하는 모습이 불안했다. 내 생각으로는 '없어 나는 엄마가 좋아.'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것이다.

"많은데."

"어? 많아?"

딸의 대답에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한 가지만 말해달라고 애걸을 했다. 딸은 '말하면 뭐 달라져?'라는 표정으로 나를 흘끔 보더니 인심 쓰는 척 포도주 대신 욕조 뚜껑 위에 올려놓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뭐, 우리 식구들이 다 그렇기는 한데 자기들 기분 나쁠 때 갑자기 화내는 거 있거든. 자기가 기분 나쁜데 왜 나한테 화를 내지? 나는 그럴 때가 제일 싫어."

'내가 언제 그랬냐?' 입을 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에도 서울에 다녀오니 몸이 피곤해서 짜증이 난 터에 눈에 보이는 딸의 인형을 가지고 한 마디 했었다. 하지만 그 인형은 늘 그 자리에서 머리를 산발하고 누워 있었다.

'헉!' 나는 딸의 말을 반박하기에 무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엄마이기 전에 교사로서 아이들 교육하고 훈육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부분을 딸에게 지적당한 것이다. 내가 늘 반성하고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딸은 본인이 가족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쓰였다고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 나의 그런 행동을 알아챘지만 딸이 아무 말이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행동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딸에게 나는 할 말을 고민해야 했다. 딸의 말을 듣고 AI처럼 이 시점에 필요한 대화법을 검색하느라 내 머리는 초단위로 가동했다.

'딸은 이제 아기가 아니다. 갱년기 엄마에게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 사춘기를 준비하는 딸이다. 나는 뭐라고 대화를 이어갈까?' 이성의 뇌를 활성화시키느라 눈동자를 돌리는 나에게 딸이 말했다.

"엄마 화났어?"

"아니, 화 안 났어."

"음~ 나는 말을 안 해서 화난 줄."

순간 뇌기능이 감정의 뇌로 바뀔 뻔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화가 나면 일단 입을 닫는다. 딸은 나를 다 관찰하고 있었다. 가 사용하는 방어기제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법도 이미 알고 있는 만만치 않은 딸이 확실하다. 딸이 배우지 않기를 바랐건만 이미 학습되고 있는 건 아닌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머리에 샴푸 거품을 묻히면서 입을 열었다.

"딸아 미안해. 하지만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해 엄마가 표현을 잘 못 한 거야. 그러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을까?"

딸은 갑질하는 드라마 속 사모님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나의 사과를 받아 줄까 말까를 고민하듯 듣고만 있는 것이다.

"딸아, 지금은 엄마가 화가 나 있으니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 이렇게 할까? 저 인형을 치우지 않아서 엄마가 매번 깜짝 놀라서 기절할 것 같구나 그러니 치워 줄 수 있겠니? 이렇게?"

"그거 좋겠네."

아주 거만하기 짝이 없는 딸에게 섭섭한 마음을 회복하고 싶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뭐 좋은 점은 없었어? 너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힘들어도 다 해준 거 같은데 그런 건 생각 안 나?"

"다해준건 아니지. 그리고 기분 나쁘게 해 준 것도 있지."

입덧하는 마누라처럼 시도 때도 없이 국물떡볶이가 당기고 마라탕이 먹고 싶고 연어초밥이 간절하다고 하면 헐레벌떡 만들어 먹이면서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딸은 그 음식의 맛보다 그 감정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랬구나. 다음에는 너도 나에게 물어보고 서로 합의해서 웃으면서 하자."


'딸에게 엄마가 최고라는 말을 듣기에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싶었다. 기분 좋게 목욕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우리는 다시 사이좋은? 딸과 엄마로 돌아왔다.


목욕과 욕실 정리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니 딸과의 2차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실은 종이, 연필, 풀, 기타 등 만들기 재료들로 엉망진창이고 식탁 위에는 먹지는 않고 뜯어만 놓은 불량식품과 불다만 본드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 딸 아주 즐겁게 놀았구나. 잘했어요. 그런데 이것들 좀 치워주지 않으련? 안치우면 엄마가 치워야 하고 그러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갱년기 아줌마의 버럭증세가 나타날 것 같구나.'

이렇게 배운 대로 말해야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 '나는 좋은 엄마다. 할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에 눈치 빠른 딸이 따라 나와서 거실을 치우면서 말했다.

"이제 4학년인데 이런 거 그만 만들어야겠다. 인형도 유치원 동생들 가져다줄까?"

"좋은 생각이다. 저녁은 뭐가 당기시나?"

나는 딸에게 물었고 딸은 대답했다.

"아무거나."

항상 메뉴를 딱 집어서 말하던 딸이 나를 배려해서 지목한 메뉴가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아무거나'라는 메뉴를 주문했다. 딸은 내가 '아무거나' 메뉴에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관찰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무거나'를 만들었고 맛있게 먹었다.


아이와의 대화도 성인과의 대화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력하고 습관들이기에 따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으로 대화하듯이 딸에게도 더 노력해야겠다. 100퍼센트 자신은 없다. 하지만 늘 부족한 엄마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다시 노력하고 사과하고 협상하면서 딸과 성장할 것이다. 나는 아들 키우기보다 딸이 어렵다.


사춘기 시작하는 딸아,
엄마도 갱년기 시작이야.
함께 각자의 갈 길로 잘 성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