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겨울에 신청했던 영어마을 체험을 앞두고 딸을 보낼지 말 지 고민스러웠다. 남편이 떠나고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불안이 함께 자리 잡게 된 것 같았다. 잠깐 외출을 했다가 집에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불안해서 받을 때까지 계속 연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 무슨 일 있어? 부재중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어."
"너는 왜 전화를 안 받아. 큰 오빠도 안 받고.."
"나는 설거지하느라고 못 받았어. 큰 오빠는 2층에서 헤드폰 쓰고 공부해."
"네가 설거지를 왜 해. 그냥 둬."
"내가 먹었다고 오빠가 나보고 하래. 나, 잘해."
전화를 끊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는 내 불안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가족톡에 문자를 남겼다.'엄마가 요즘 불안 한가 봐. 당분간 전화하면 바로 받아줘. 미안해.'
4박 5일 동안 영어마을 체험을 보낸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딸의 의견이 제일 중요했다.
"딸아, 영어마을 갈 거야?"
"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엄마가 불안해서 그래? 나는 괜찮아. 학교보다 좋을 것 같은데."
딸은 씩씩하게 체험을 떠났다. 떠나는 당일 날도 나는 출근 때문에 관광버스가 떠날 때를 기리다가 손을 흔드는 엄마들 속에 없었다. 돌아오는 날도
엄마나 아빠 대신 큰오빠가 마중을 나갔다.
4박 5일 만에 만난 딸은 말을 안 하고 내 품에 한 동안 안겨있었다.
"어땠어? 좋았어?"
"재미있었어. 그런데 식단이 내 입맛하고 안 맞아. 오늘 라면 먹어도 되지?"
나의 불안이 다소 해소되는 경험이 되었다. 그날 저녁은 남편의 3제가 있는 날이었다. 여동생이 반차를 내고 몇 시간을 달려서 형부 3제에 참여했다. 제사보다 나와 어린 조카 걱정과 내 마음만큼이나 정리가 필요한 우리 집을 정리해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동생도 바쁘고 힘든데 나 때문에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왔다.
내가 일을 정리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사이 3주 만에 만난 이모 품에 안겨서 '아빠가 보고 싶어.' 라며 울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내가 애들 앞에서 울 수 없는 것처럼 엄마 앞에서는 흘릴 수 없는 눈물을 이모 앞에서 흘린 딸의 마음도 내 맘과 같았던 것일까? 집에 있는 날은 내가 퇴근을 하면 항상 달려 나와서 가방을 들어주던 남편이 이제 없다는 걸 나도 매일 확인하면서 살고 있었다. 어딘가에 다녀오면 엄마 대신 항상 마중을 나가고 기다려주던 아빠가 정말 세상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밀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딸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아프지 않던 딸이 영어마을 체험 후에 고열이 났다. 응급실로 달려가서 코로나와 독감 검사를 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앞자리에 주말농장에 왔다가 벌에 쏘인 딸을 데리고 응급실에 온 부부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딸의 증세를 살피고 있었다. 나도 그 아이 보호자인 것처럼 반대편 가족을 우두커니 보게 되었다.
"엄마, 아빠가 있을 때도 병원에는 항상 엄마랑 왔잖아."
"그랬었구나. 에구~ 똑똑한 딸 덕분에 그걸 이제 알았네."
나는 딸의 양볼을 감싸며 미소 지었다.
결국 딸은 A형 독감으로 1주일을 집에서 쉬었고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이우영! 역시 우리 딸이지?
내가 더 문제야. 나를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