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하고 딸을 깨웠다. 학교에 보내고 나도 법원에 갈 채비를 했다. 일찍 준비했는데 막상 나가려니 빨래도 널어야 하고 마음이 바빴다.
"책도 챙겼고 물도 챙겼고 압박스타킹은 가방에 있고 쓰레기는 여기 있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준비물을 챙겼다. 집을 떠나 3킬로쯤 갔는데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서 찾았다.
"내가 미친다."
너그럽게 나를 이해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여기서 끝냈을까?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그동안 나를 가혹하게 다그치며 살았는데 가끔은 이렇게 나 자신을 너그럽게 봐주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
개화역 환승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9호선을 타고 교대역으로 향했다. 9호선에 급행과 일반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남편이 많이 이용했던 개화역의 9호선, 급행열차는 지난겨울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해 달라는 듯 추억을 싣고 달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지하철 계단을 바쁘게 오르고 교대역에서 법원까지 뛰는 것처럼 걸었다. 여름을 보내는 동안 걷는 시간이 적었던 탓인지 다리가 남에 다리같이 느껴졌다. 늦지 않게 도착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땀이 계속 났다. 재판하는 동안에도 계속 닦았다.
재판은 10분 안에 끝이 났다. 추가자료가 있으면 더 제출하는 것으로 11월 21로 다음 재판이 잡혔다. 판사들은 궁금한 것이 없는지, 서면은 제대로 봤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끝이 났다. 만화영화에 사용한 캐릭터는 본인들이 만들었다는 반대쪽 서면에 관해서 물어볼 만도 한데 묻지 않았다.
사자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 했던 감독이 증인이 되어서 제출한 서면은 어이가 없다. 만화영화로 파생한 수익이 많았는지 만화영화 캐릭터를 포기 못 하고 있다. 원작 캐릭터와 만화영화에 사용한 캐릭터가 달라서 남편과는 상관없다는 주장은 오히려 병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주장은 뽀로로를 살진 모습으로 그렸다고 뽀로로가 아니라는 말, 누가 봐도 둘리인데 얼굴이 뾰족하게 그려서 둘리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다. 사자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 했던 감독을 다시 민사로 고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대표가 수백억 자산을 키우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은 새벽 4시에 집을 나갔고 9호선 급행열차에 몸을 싣고 수업 준비와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뱀이 개구리를 살금살금 삼키듯이 오랜 시간, 남편은 뱀에게 먹혔다. 억울함을 푸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재판에서 승소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권선징악을 믿어 보는 것이다. 나쁜 짓을 대놓고 하고 당당하거나 뻔뻔하게 사는 세상에 권선징악이라니 웃기는 말이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내 책을 표지만 바꿔 판매한 것에 관한 내용증명에는 예상대로 대답이 없었다. 오늘 그 상담까지 받고 돌아왔다. 긴 하루였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모교 교수님과 근무했던 대학에 연락했다. 20년 넘게 못 만남 남편 동기들, 해외에서 일하는 작가부터 오랜 친구를 가리지 않고 연락했다. 평소 같으면 농담으로 시작해서 우리 집에 놀러 오라는 말로 마무리했을 전화였다.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부탁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했다. 친구는 직접 통화할 자신이 없어서 톡으로만 대화했다. 오랜 친구는 모는 걸 내려놓게 하는 힘이 있다. 울어버릴까 봐 통화를 못 했다. 도와줄 거고 자신의 이름 맘대로 쓰라고 하는 친구의 문장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언니, 오늘 힘들었겠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동생 말에 급한 마음을 진정하고 남편 귀갓길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엄마~"
마당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방충망 뒤에서 딸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