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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Nov 12. 2024

그날을 기다리며


반복되는 일상이 행복하고 고맙기도 하지만 반복되는 재판은 재미없다. 주장을 바꾸며 진화하는 그들의 억지 이야기를 읽으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그냥 지나가기로 했던 몇 가지 사건을 민사로 진행해야겠다는 분노를 가슴에 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요일 아침, 알람에 길들여진 내 몸이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이미 뇌는 활동을 시작했다. 머리맡에 던져진 서류를 보고도 어제 기분은 아니다. 이성적 판단을 하게 된다. 다행이다. 일단 오늘을 살자. 잠시 눈을 감고 스트레칭을 하며 머릿속에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첫째, 추워지면 마늘밭에 덮어 줄 보온 덥게 정리.

둘째, 여름에 잘라놓고 말라 버린 아카가시아나무와 쌓이기 시작한 낙엽 치우기.

셋째, 우거지 만들기.

넷째, 튤립 구근 심기

다섯째, 서리태콩 정리.

힘쓰는 일은 아들들에게 시키고 나머지는 내가 천천히 하면 된다. 늘 그랬듯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마음을 추스르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10월에 수확한 고구마 10개를 꺼내 씻었다. 요술 프라이팬에 넣어 휴대용 가스렌즈에 올렸다. 쌀을 씻어 밥도 안쳤다. 청소기를 돌리려다 아이들의 주말 아침, 달콤한 늦잠지켜주기로 했다. 청소는 뒤로 미루고 마당으로 나왔다. 숫자만 바뀐 가을이 마당에 찾아왔다. 얼마 전에 심은 소국은 흠뻑 내린 비를 맞고 촉촉한 땅에 당당하게 피어있다. 작년과 똑같은 방법으로 3주에 걸쳐 심은 양파와 마늘에 눈길이 갔다. 봄에 나와야 하는 마늘 싹이 올라와 있다. 봄으로 착각한 이 날씨를 어쩌나.


고구마가 익고 밥이 되는 동안 마늘밭고랑으로 보온 덮개를 옮겼다. 수돗가에 있화구를 피울 곳으로 옮기고 양은솥을 닦았다. 우거지 삶을 물까지 받아 놓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찌개를 올려놓고 세탁기 작동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청소를 했다. 내 몸은 리듬을 타듯 움직인다. 찌개가 끓고 두부조림도 자작하게 졸여졌다.

"밥 먹자."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냉장고에 반찬을 꺼내며 아이들을 깨웠다. 압력밥솥 뚜껑을 여는 순간 콩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은  낙엽 치우는 거야."

"그거 하나만 하면 되지? 엄마랑 일하면 계속 늘어나거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다. 남편이 나랑 일하며 불만스럽게 했던 말인데 아들이 똑같은 말을 했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오늘은 가시나무랑 낙엽만 치우면 된다. 내가 몸이 부서지라 다 하지 뭐."

"그거 봐, 가시나무 늘었잖아."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앉아서 밥을 먹었다. 반복되는 일상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막내도 일을 해야 한다는 오빠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딸은 곱게 키워야 곱게 산다는 내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공주처럼 키우고 싶다는 엄마 의견에 100% 동의하지 않고 그렇게 클 딸도 아니지만 엄마랑 반대로 키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애들은 알고 있다. 막내를 위해서 식탁 위에 군 고구마와 과일을 올려놓고 마당으로 나왔다.


각자 맡은 일을 할 장소로 이동했다. 아들들은 수레, 빗자루, 갈퀴를 들고 뒤뜰로 사라졌다. 나는 낙엽을 모아 불을 피웠다. 우거지를 보고 좋아할 친구를 생각하며 물을 끓였다.

"엄마, 불 잘 피우지 않니?"

"연기 때문에 일하기가 힘든데. 신고당하는 거 아니지?"

땔감으로 마른 잔디, 낙엽과 서리태콩을 털고 남은 대공을 이용했다. 삶은 배추를 담아 채반에 받쳐, 야외 테이블에 올려놨다. 오빠들의 요구로 딸이 가져온 물을 한 잔 마시며 하늘을 감상했다. 

"하늘 예쁘다."

"그러네. 춥지도 않고..."

하늘 보고 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지난주에 정리해 놓은 장소에 듈립구군을  심기 시작했다. 튤립 색깔에 맞춰 줄을 정해 심었다. 내년 봄에 에버랜드에 가지 않아도 튤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꽃이 봄을 기다리게 해주는 이유가 되길 바라며 정성껏 심고 보온 덮개를 덮었다.   


"아휴, 힘들어. 콩은 내일 해야겠다. 얘들아, 저녁에는 삼겹살 먹을까?"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작년 이맘때도 비슷하게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있어서 나는 살았다. 이 일상을 유지하게 해 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된다. 탐욕으로 미쳐버린 사람들에 흔들리지 말고 이렇게 살면 된다. 아빠가 치우던 낙엽을 아이들과 치우면서 이렇게 살면 된다.


따뜻한 기온에 속아 얼굴을 내민 마늘 싹이 다가올 추위에 놀라 성장을 멈추겠지만 곧 월동 자세로 태세를 전환하고 내년 봄에 건강한 마늘로 만날 것을 믿는다. 우리 가족도 그렇게 성장할 것이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고 봄이 오면 튤립은 꽃을 피우고 마늘은 연두색 싹을 피우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리라. 그날이 오면  따끈한 차 한잔을 들고 나와 건배하리라. 아름다운 그날은 꼭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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