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의 밀도
어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해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기 위해
관계를 맺는다.
그 사람은 늘 자기 이야기를 한다.
속상했던 일, 억울했던 일,
자기가 얼마나 참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오래,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해받았다는 감각이 들면
그 사람은 갑자기 특별해진다.
칭찬을 아끼지 않고,
가깝다는 말을 쉽게 쓰고,
“나는 아무나 친구로 두지 않는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 곁에 남는 사람들은 늘 비슷하다.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자기 편을 들어주고,
자기가 만든 연민의 프레임 안에
기꺼이 들어와 준 사람들이다.
이해 중독자는
타인의 사정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정을 대신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을
내가 한 말처럼 정리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판단을
내 선택인 것처럼 설명한다.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는데,
어느새 누군가는
내 형편을 대신 설명하고,
내 일정을 대신 정리하고,
내 관계의 가능성까지
자기 입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걸 위로라고 부르기엔
너무 많은 판단이 섞여 있었고,
관심이라고 하기엔
선을 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종종
이렇게 자신을 설명한다.
“나는 착해서 다 받아준다.”
“나는 참는 편이라 괜찮다.”
하지만 진짜 착한 사람은
자기 착함을 설명하지 않는다.
참고 있다는 말로
자기 위치를 증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해 중독자에게
착함은 성격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준에 가깝다.
자기를 이해해주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이해를 거부하면
그 사람은 금세
좋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런 관계에는
공통된 시작이 있다.
처음부터 유난히 잘해준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관심을 주고,
너무 깊이 들어오고,
마치 오래된 사람처럼 다가오는 친절은
대개 조금 빠르다.
그 친절은
아무 대가 없는 호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향이 정해져 있다.
자기가 해준 만큼
상대도 해주길 바라고,
자기가 내준 마음의 크기만큼
되돌려받길 기대한다.
그래서 그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사람은 이렇게 분류된다.
이해해주지 않은 사람.
나를 알아주지 않은 사람.
좋지 않은 사람.
그래서 이해 중독자의 관계는 가볍다.
사람은 자주 바뀌고,
이야기는 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다시 흘러간다.
조언을 사양하거나,
선을 긋거나,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관계는 아주 조용히 끝난다.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사람은
그 관계 안에서
더 이상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도 든다.
혹시 나 역시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감당하라고
요구하고 있진 않았는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않으면
멀어졌다고 느끼며,
내 마음을 다 받아주지 않으면
차갑다고 판단한 적은 없었는지.
이해를 바라는 마음과
이해를 요구하는 태도는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
그 경계를 넘는 순간,
관계는
서로를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떠맡는 구조가 된다.
누가 옳았는지,
누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태도로 관계를 맺었는지는
결국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이것이
이해 중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