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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bel Sep 07. 2024

아무것도 안 하는 하루

독일에서 지낸 첫 일 년 중에 기억에 남는 날을 묻는다면, 나는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의 하루를 고를 것이다. 당시에 나는 오페어로 일을 하고 있었고, 집안일이 끝나서 다른 일거리는 없는지 찾고있었다. 카티야는 위층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인기척을 내니 웃으며 다가왔다. 다른 할 일이 없는지 묻자 카티야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너무 좋은데 일을 하며 보내기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 오늘은 햇빛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 건 어때?  '아 그래? 알겠어 고마워!' 하고 웃으며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생각했다.

아니 햇빛을 즐기라니 그게 뭔 소리야. 그렇게 내 방으로 내려와 나는 한참을 멍 때렸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라는 건가?  내게 하루는 항상 과제나 일, 운동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날씨를 즐기라니. 이해가 안 되는데.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렇게 앉아 생각해 보니 지난 몇 년간은 정신없이 달려오기만 했구나, 제대로 쉬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날은 카티야 말대로 빛이 잘 드는 방에 앉아 가든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이런 게 쉬는 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게 내게 필요한지도 몰랐는데...


나의 기나긴 학교생활은 항상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한두 달씩 여행을 가곤 했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항상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기에 쉬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이것도 하나의 정해진 일정이었다. 주변도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있고, 집에 가면 가족들이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 해봤자 어디론가 이동할 때 잠깐 뿐이었다. 온전히 혼자였던 시간이 있었던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가든을 보며 생각했다. 세상에 녹색이 저렇게 다양하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시간을 더 느리게 보여주는 것 같아. 구름이 지나가면 저런 식으로 빛이 바뀌는구나. 여기에 저런 꽃들도 있었네. 장미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어? 원래 이렇게 새빨간 꽃이 피였었나?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동안 이런 것들을 놓치고 살았지? 아 그래, 대학교에선 일하고 그림 그리고 공부하느라 바쁘게 지냈는데 여기선 대학교를 다시 가려고 거기에만 집중하며 지냈지..  혼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너무 평화롭다.

2014년 Bonn에서 지냈던 집의 정원 그리고 여름 내내 다양한 붉은색을 보여준 장미꽃


이런 게 숨을 쉬는 게 아닐까. 육체적으로 쉬는 숨이 아니라, 정신에 불어넣는 숨. 인간이 잠을 안 자고 생각을 멈출 수 없다면 미쳐버릴 거야. 명상도 그런 거 아닐까? 쉼표를 찍어주는 거. 그래서 밖에 나가면 발코니나 공원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나? '이런 시간을 좀 더 자주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도 언젠간 스스로 휴식을 갖는 건강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잡생각을 떠올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Genieße die Zeit, Genießt die Sonne, Genieß die Ruhe 등등 독일에서는 자주 이런 말들을 하는데   

시간을 즐겨, 햇빛을 즐겨, 너의 휴식을 즐겨라는 말이다.

Genißen는 즐기다/향유하다 또는 (유익한 것을) 받아들이다, 경험하다는 의미가 있다.


Bonn에서 지나쳤던 사람들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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