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도 둔감함도,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둔감할까? 혹은, 왜 이렇게 예민할까?

하나의 몸 안에 이토록 상반된 감정이 함께 존재한다는 게 때로는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떤 상황에서는 무덤덤하게 넘어가면서도, 어떤 말 한마디엔 작은 가시처럼 마음이 오래도록 찔린다.

둔한 듯 예민하고, 예민한 듯 둔한 내가 나조차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감정에 대한 내 감각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어긋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나는 울면 혼났고, 짜증을 부리면 나쁜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억누르고 조절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속마음을 숨기는 게 먼저였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렇게 밀려난 감정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나는 웃었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 앞에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허용하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마음을 열면 무너질 것 같은 불안이 내 안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재빨리 차단하거나, 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나를 보호했다.


지금 돌아보면, 둔감함도 예민함도 결국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다.

둔감함은 상처로부터 나를 마비시키는 생존 전략이었고,

예민함은 다가올 위험을 미리 감지하려는 경계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감정이 공존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나만의 방어 방식이자, 생존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감정의 온도를 다시 배우는 중이다.

속상할 땐 “속상해”라고 말하고, 두려울 땐 그 감정 안에 잠시 머물러보려 애쓴다.

여전히 어색하고 서툴지만, 감정을 회피하지 않을수록 내 마음에 대한 이해는 조금씩 깊어진다.

감정도 근육과 같아서,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굳는다.

조금씩 익숙해져야 다시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무딘 나도, 예민한 나도 모두 내가 살아온 방식의 결과라는 것을.

그러니 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일이

나를 회복과 성장으로 이끄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누군가가 다가왔을 때,

감정을 억지로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비로소 나로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오랜 시간 기다려온 감정의 회복이자 성장이다.







글은 심리상담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내면을 만나며 관찰해 온 감정의 패턴을 바탕으로 구성한, 상징적인 ‘한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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