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지지대고개에 나를 버렸다

가위 가져와!

by 비비걸

“박00 가위 가져와!” 일요일,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름만 불렀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굳이 내 성까지 붙여서 “박00!”. 게다가 가위랑 방금 벗어둔 옷을 가져오라지 뭐야. 엄마는 약속 있어서 나랑 아빠 단둘이었다.


전날 밤 늦게 집에 들어왔으니 내가 잘못한 게 있긴 했다. '이 옷을 버리라는 건가?' '아빠가 내 눈앞에서 이 옷을 자르는 걸 보게 되는 건가?' '싹둑싹둑!' 그리고는 내 손에 들린 가위로 내가 직접 옷을 자르게 되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옷감을 자르는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아하던 옷을 자르는 순간, 눈물이라도 펑펑 쏟아질 줄 알았다. 근데 옷감은 가위로 자르면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고, 자르는 내내 재밌고 짜릿하기까지 했다.


나는 꾸미고 나가서 사람 만나는 걸 정말 좋아했다. 옷 사고 싶은데 못 사면 다음 날 어떻게든 꼭 사야만 직성이 풀렸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아파서 드러누운 날 빼고는 밖으로 엄청 싸돌아다녔다. 심지어 열이 펄펄 나도 일단은 나갔다가 쓰러질 것 같으면 들어왔다. 그렇다고 비행청소년은 아니었다.


“박00 교복으로 갈아입어!” 또 내 풀네임을 다 불렀다. '아, 오늘 나는 쫓겨나는 날이구나! 올 것이 왔네. 바로 오늘이 그날이구나.' 슬프지도, 반성이 되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교복으로 갈아입고는 돈이랑 통장, 도장 등을 챙겼다. 느낌적으로 돈이 필요할 거라고 직감했다고나 할까?


아빠는 차에 타라고 했다. 순순히 아빠를 따라 차에 올랐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차 안은 적막만 흘렀다. 부릉, 시동이 걸리고 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그런데 가다가 우연히 엄마 차가 보였고, 엄마는 반가운 마음에 해맑게 손을 흔들며 우리 차를 세웠다. 하지만 차 안 분위기가 살벌했는지,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엄마는 묻지도 않고 바로 차에 탔다.


그렇게 우리는 셋이 나들이 가는 듯 아닌 듯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수원에 살았다. 아빠는 의왕시와 수원시 경계에서 내리라고 했다. 지금의 지지대고개라고 하는 곳이다. 그때도 나는 잘못했다고 끝까지 빌지 않았다.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빠는 막내딸이 반성할 것을 기대했겠지만, 나는 차에서 그냥 내렸다. 내 머릿속은 온통 '바로 어디를 갈까?'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미 일이 벌어졌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부모님이 나를 도시와 도시의 경계선에 그냥 내려놓고 차가 출발했다니! 기다렸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버스를 타려고 반대편으로 갔다. 그래도 내가 아는 동네에서 돌아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아빠 차가 갑자기 '끼이이익!' 하고 섰다. 그 쇠 긁는 듯한 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 엄마가 헐레벌떡 내려서 나한테 왔다. “어디 가려고? 어딜 그렇게 가?” 엄마는 내 등을 퍽퍽 쳤다. 근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살면서 맞아본 적은 없지만. 아기를 잃어버렸다가 찾은 엄마가 엉덩이를 때리면서 “어디 있었어? 엄마가 찾았잖아!” 하고 부둥켜안고 울듯이 말이다. 딱 그런 제스처였다.


버스 타러 간다고 했더니, 엄마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나를 끌고 다시 아빠 차에 태웠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연스럽다고 엄마는 판단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아빠랑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쫓겨나는 해프닝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지금도 생각해보면 사춘기 때는 아무리 혼나도 반성 같은 건 하나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너무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며칠 동안은 풀 죽은 채로 집에서 찌그러져 있었다. 웃지도 않고 까불지도 않고 말이다.


깡통처럼 지내던 어느 날, 눈떠보니 내 책상에 십만 원이 놓여 있었다! 아빠가 출근하면서 전화를 했다. 쭈그러진 내 모습이 더 싫었나 보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라고, 돈 쓰고 나가 놀고 친구들 만나라고.


나는 그 한마디에 바로 신이 났다. 아빠를 다시 사랑스럽게 보았다. 그날 그 돈을 다 쓰고 나서야 집에 들어왔다. 내가 얌전히, 조용히 살기를 바랐을 텐데, 내 성향을 꺾을 수 없었던 아빠. 사춘기 딸을 키워보니 아무리 혼내도 그때의 나처럼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화나거나 삐졌을 때 돈 주면 풀렸던 것 같다. 엄마 카드 쓰고 행복해하는 내 딸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제 아빠가 돈을 안 주네? 받고 싶은데 한번 삐져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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