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우 Nov 02. 2020

내 이야기를 멋지게 표현하는 방법

교수님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어떤 시놉시스라도 좋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벌써 두 번이나 시놉을 바꾸었다. 처음엔 편의점에 일하는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설정했으나 그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포기. 두 번째 시놉을 고민 중에,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이 떠올랐다. 혼자 사는 주인공의 자취방에 놀러 온 아버지 이야기를 비슷하게 베껴서 제출했다. 그러나 역시 교수님은 교수님이었다. 단번에 김애란 작가의 소설과 비슷하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나는 정말 창피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된 시놉시스를 써야만 한다.

그래, 그냥 내 이야기를 쓰자. 그게 가장 쉬운 방법 같았다. 일곱 여덟 살쯤 오빠와 나는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는 엄마 아빠를 종종 기다리곤 했다. 그 날은 마침 토요미스테리라는 으스스한 프로그램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나는 졸려서 자고 있었고, 무서워진 오빠가 나를 여러 번 깨웠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 않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고 한다. 갑자기 내가 악 소리와 함께 번쩍 눈을 떴다. 눈 앞에는 분무기를 든 오빠가 보였고 내 얼굴엔 물방울이 촘촘히 맺혀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한편이 알싸해졌다. 오빠와의 추억이 너무 귀여워서.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 남겨진 우리의 과거가 안쓰러워서. 우선은 아무도 없는 빈집에 남겨진 남매의 이야기로 잡고 시나리오 구성을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글을 보고 친구들이 물었다. 이야기가 신선하다고 말했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라곤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얼버무렸다. 재밌다고 칭찬을 받으니 나의 과거가 조금 달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그 날은 내 글을 합평한다고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업 전 미리 제출한 글 중에서 교수님이 괜찮은 글만 골라서 합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교수님은 계속 나에게 질문했다. 남매가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왜 먹기 싫어하는지. 엄마는 어디에서 새벽까지 일하는지. 얼떨결에 엄마는 24시간 해장국 집에서 일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남매는 해장국을 지겨워하는 설정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나도 해장국이 지겨웠다. 엄마가 일하는 미용실 바로 맞은편에 해장국 집이 있었는데, 엄마는 툭하면 해장국을 포장해왔다. 그때 그 해장국의 퍽퍽한 고기와 기름이 둥둥 떠있는 갈색 국물이 떠올랐다.

교수님이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기억하지 못했을 ‘해장국’ 소재가 글에 추가됐다. 교수님이 하나하나 날카롭게 지적하는 탓에 글을 쓰면서 디테일에 신경 쓰게 되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소재 한 개만 시나리오로 가져왔을 뿐인데, 과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많이 달라졌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샅샅이 과거를 탐색했다. 나도 잊고 있었던 어렸을 적 작은 소재가 툭툭 튀어나왔다.  

성적 확인하는 날. 교수님이 미리 말해준 성적 평가 기준을 떠올렸다. 우선은 잘 쓴 글. 그리고 처음보다 더 큰 성장을 보인 글. 나는 처음보다 더 큰 성장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글 안에 어떤 성장의 증거가 숨겨져 있기를 희망했다. 두근거리며 확인해보니 역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작가는 필연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교수님이 스치듯 말한 게 떠올랐다. 난생처음 시나리오를 쓰면서, 나는 내 이야기를 멋지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로지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과거를 재해석하는 즐거움도 느꼈다. 성적을 확인한 후 완성한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다. 욕조 안에서 한참을 따뜻하게 목욕을 마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교수님을 만나 좋은 수업을 들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