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엄마는‘~했더라면 ~했을 텐데’로 구성된 가정법 문장을 자주 사용했다. “그때 아빠와 이혼을 했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텐데. 그때 그 간호사가 약을 제대로 넣었다면 오빠는 살 수 있었을 텐데”와 같은. 나 역시 내 나름대로 몇 개의 가정법 문장을 갖고 있다. 내가 그날 엄마를 도와 같이 병원에 갔더라면. 오빠가 죽은 그 시간에 집에서 혼자 만화를 보고 웃지 않았더라면.
2002년, 어느 여름밤. 오빠가 갑자기 잠을 자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엄마가 몇 번이나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오빠는 한사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바쁘게 숨을 내 쉬고 나면 오빠 말대로 괜찮아진 듯 잠잠해졌지만, 잠시 후 다시 헉헉거렸다.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쉰다는 게, 정말 심각할 정도로 위험한 건지 몰랐다. 아무리 어려도 그렇게 몰라선 안됐다. 아무리 졸려도 엄마와 같이 병원에 갔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 엄마가 말했다. 오빠가 응급실에 있다고.
응급실에서 오빠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냥 오빠가 며칠 아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오빠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오빠가 병원에서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집에서 혼자 만화 보노보노를 보고 있었다. 보노보노가 “뽀로리야~”라고 귀엽게 말하는 장면에 히히덕거리고 웃었다. 그랬으면 안 됐다. 아무리 어려도 그렇게 몰랐으면 안 됐다. 사람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 이후로 계속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랬으면 안 됐다고.
아빠와 이혼하지 않아서 모든 일이 발생했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를 죽이고 싶었다. 그날 우리 셋만 놔두고 어딘가로 가버린 아빠를, 오빠가 아프다고 엄마가 전화해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아빠를 벌주고 싶었다. 약을 많이 투여했다던 그 간호사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누군가가 너무 미워서 어찌할지 모르는 감정의 응어리가 뱃속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중 제일 미운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너무 싫어서, 공책에 쓸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적었다. 그래도 여전히 죽도록 미웠다.
소설 <안녕 주정뱅이>의 단편 <카메라>에는 관희와 그녀의 남동생 관주, 그리고 관희의 직장동료 문정이 등장한다. 문정과 관주는 관희 모르게 짧게 연애를 했다. 문정은 스치듯 지나가면서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고, 관주는 카메라를 구매한다. 관주는 그 카메라로 어느 골목에서 외국인의 사진을 찍다가, 불법 체류자였던 그 외국인이 관주의 카메라를 뺏는 과정에서 돌길에 머리를 부딪쳐 죽게 된다.
관희는 동생의 죽게 된 원인을 찾아내서 죽도록 미워하고 싶었다. 돌길을 만들라고 지시한 지자체, 카메라를 뺏은 외국인 노동자, 죽음을 몰고 온 카메라까지. 책임을 지라고 소리칠 대상들은 여기저기 널려있다. 저 돌만 아니었다면. 저 외국인 노동자만 아니었다면. 저 카메라만 아니었다면. 그 과정에서 관희는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정은 관주와 짧게 연애한 후, 그와 2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관희와 오랜만에 만나 대화하며 그제야 관주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희 역시, 관주가 카메라를 구매한 이유가 문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문정의 주먹 쥔 손을 관희가 살며시 퍼주며 말했다.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 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 그녀는 자신도 아프지만, 문정은 자신만큼 아프길 원치 않았다. 관주가 관희에게 했던 말이 맞았다. 관희는 나쁜 사람이 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그 말.
며칠 뒤 관희는 문정에게 카메라를 보내준다. 그녀는 동생의 죽음을 몰고 온 그 카메라를, 그냥 사진을 찍는 카메라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관희는 관주가 죽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길가에 돌일 수 없고, 관주를 죽일 의도가 없었던 외국인일 수도 없고,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한 문정일 수도 없다. 그냥 그렇게 사건은 발생했고, 그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일뿐이다.
엄마는 아직도 아빠 욕을 한다. 무엇인가를 탓해서 어떻게든 오빠가 죽은 원인을 찾고 책임을 지라고 소리치고 싶은 게 당연했다. 나도 아빠를 욕하고 싶었다. 그날 간호사가 유난히 약을 많이 투여한 것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간호사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오빠의 일에 무심하게 대처했던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원인을 찾고 누군가를 미친 듯이 욕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지만, 관희의 말처럼 나는 점점 나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놓아야 살 수 있다는 관희의 말이 내 마음에 통통 울렸다. 누군가를 탓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아야 살 수 있다는 관희의 배려가 따뜻했다. 오빠. 정말 미안하지만, 나도 이제 놓아도 될까. 오빠가 갑자기 아파서 세상을 떠나버린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누군가를 탓할 이유도 없는, 그냥 그렇게 발생해버린 사건이라고. 이제 나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을 멈춰도 될까. 오빠는 착한 사람이니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빠가 죽은 지 17년이나 됐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아직도 울 수밖에 없다. 어딘가 답답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여전히 나는 그때 내가 그랬으면 안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빠가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내 동생은 그때 어렸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제 놓아도 된다고. 세상에는 원인을 찾을 수도 없고, 그냥 그렇게 발생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일 이종종 생기기 마련이라고. 딱 그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