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늘 공포 속에 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이상해, 왜 저럴까 답답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을 공포라는 단어로 구체화하여 바라보기까지는 정말 긴 세월이 흘렀다.
엄마의 공포(fear) 반응의 실체는 불안(anxiety)과 화(anger)이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불안으로 가족보다는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하였고 가족과의 시간, 관계를 희생해야 했다. 이혼 후에도 아빠의 형제, 친구들과의 관계를 엄마가 이어갔고, 때론 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식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일을 하고, 심지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의 지인들을 위해 더 안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강요받고 희생하기까지 해야 했다. 주변에는 자신의 힘듦을 호소하며 동정을 구했고, 좋은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나누는데 그것이 과도했다. 돈을 벌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삶을 만들었다.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는 놓치고 단지 뭐라도 하려는 엄마만의 불안 해소법은 늘 긴장감을 유발했다. 나이가 들자, 난 곧 죽는다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벌써 십 년이 넘게 발산한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에 뿌리를 둔 그 '뭐라도 하는' 마음은 고통이었고, 주변에 끊임없는 강요와 불만으로 터져 나왔다.
엄마는 중학생까지 전라남도 순천의 시골 마을에 사셨다. 명절에 그곳에 가면, 넓게 펼쳐진 논밭과 그 사이에 난 오솔길, 그 길 초입에 구옥 마을이 나의 오감을 깨우며 맞이해 주었다. 눈은 탁 트이고 깊이 들이마시는 숨은 달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름 가득한 미소와 함께 내어주시는 따듯한 시골 밥상은, 혀부터 오장육부까지 살아나게 하는 듯한 건강한 맛이었다. 겨울에는 뜨끈하게 데워진 구들장에서, 여름에는 처마 그저께 시원한 툇마루에서 먹는 밥맛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추억이다. 나는 그곳을 사랑했다. 그곳의 장면과 공기,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과 냄새, 그 기억들은 지금도 오감으로 떠오른다. 나의 깊은 어느 구석에 흐르는 따듯함은 그곳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는 그곳을 싫어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창피해했고, 시골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동네 골목대장이었다던 엄마는 중학교 때 스스로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 작은할아버지 댁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엄마의 젊은 날을 추측해 보건대,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고,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외적 모습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그런 열망과 불안을 형성한 어린 시절의 깊은 사연은 더는 알지 못한다.
사회적 관계, 돈, 죽음에 대한 불안은 모든 곳으로 암처럼 퍼져 나갔다. 이는, 주변인에게 끊임없는 강요와 불만으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리더였던 우리 집에 불안과 화가 암처럼 퍼져나갔다.
엄마의 상상 속의 성공은 '생'이고, 반대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나 돈의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 모두 압도적이고 거대한 공포로 다가왔던 것 같다. 생과 존재에 대한 기쁨의 반대 편에서 서서, 죽음을 거부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사실 꽤 평범하게 보물 같은 소소한 일상을 살 수 있었던 가족이었다.
'이었다'라고 적고 보니 더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한가? 질문해 보면 여전히 그럴 수 있다고 답을 하게 된다.
엄마의 삶에게 무언라 말을 건넨다면, 무슨 말이 될까.
그 말을 되돌려 나에게 해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