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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순 Sep 08. 2020

그때가 그리울 때도 있다.

퇴사 후, 회사생활을 생각하다가

 사무실을 뛰어다녔던 그때의 공기가 그리울 때도 있다.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기며 보고서를 3건 정도 만들었을 때쯤 땀이 살짝 오른다. 전화벨이 울리고 연관부서의 업무 요청에 정중한 어투로 대답한다 (사실, 속이 끓어오를 때가 더 많다). 쉬는 시간엔 스타벅스에 가서 쿨라임을 한 잔 시킨다. 음료를 픽업하기 전에 화장실에 들려 정장 매무새를 다듬는 내 모습이 썩 괜찮아 보였다. 선배와 부대찌개에 반주를 한 뒤, 같이 했었던 야근도 가끔 생각난다. 지금은 너무 태워서 번아웃되었지만 타고 있을 때가 그립기라도 한 걸까.


 가장 그리운 건 월급이었다. 통장이라는 주유구에 매달 25일에 찍히는 숫자. 이 숫자로 돈을 의식하지 않고 대부분의 물건들을 선택할 수 있었다. 선택보다는 지름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출근길 지하철에선 핸드폰으로, 주말엔 아울렛 가서, 잠자기 전엔 컴퓨터로 질렀다. 불금에는 새로운 술집에서 못 먹어본 술을 시키고 요즘 핫한 음식을 먹으면서 밤을 태웠다. 주말엔 종종 특가로 예약해둔 호텔로 가서 바삭바삭한 이불에 몸을 던졌다. 회사에 쏟아부은 에너지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듯이 쓰고 또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월급이라는 연료의 의미가 희미해지긴 했지만, 이렇게 밑 빠진 독이었던 때가 그립기라도 한 걸까.


 회식도 가끔씩 그립다. 물론, 마음 맞는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는 조건이어야 한다. 보통 회식자리는 구석부터 채워지는데, 말을 섞기 싫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눈치싸움을 시작한다. 술잔을 돌려 먹는 A차장, 회식까지 와서 일 얘기하는 하는 K과장 등 몇몇 유명인사들을 피하는 과정이다.

 어느 회식 날이었다. 원 없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었다. 팀 회식의 1차가 중반 정도 지나갈 무렵, 우리 회사의 핵인싸인 J대리를 필두로 카톡방 하나가 생성됐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합시다!”


 마치 ‘여기여기 붙어라!’하며 엄지 손가락을 내미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엄지 손가락을 냉큼 붙잡았다. 이 방은 대리 이하, 35세 이하가 암묵적인 조건이었다. 하나둘씩 참여자가 늘어났다. 참여자들은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카톡방 하나로 단결되기 시작했다. 스파이 작전을 수행하듯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J대리가 이어서 말했다.


“티 내지 말고 조심히 나오세요! 저 먼저 나갑니다.”


 5분 뒤, “아, 오늘 몸이 안 좋아서요.”라는 말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말은 회식 자리에서 튈 때의 단골 멘트다. 최대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크템플러처럼 조신하게 나가려던 참이었다.

 젠장, 술잔을 돌려 먹는 A 차장이 눈치챈 것 같았다.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눈치였지만 낄끼빠빠도 모르는 사람에게 모르쇠로 응수했다. 나는 문을 나서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2차 장소로 뛰어갔다. 그리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서로 떠들었다.


 그날 회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 방향이 같은 동기와 안국역 스크린 도어 앞에 섰다. 갑자기 그 녀석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야, 저게 뭐냐?”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두 한 켤레가 스크린 도어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국산 유명 브랜드였다. 왼쪽 구두가 꼬꾸라져 있기는 했지만 누가 버리고 간 본새는 아니었다. 자신을 맞이해주는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 누울 곳을 찾는 듯 올라탄 게 분명했다. 저 안에서 옷까지 벗진 않았어야 할 텐데. 만약 그랬다면, 내일 SNS에 화제의 인물로 등극할 것이라며 우리는 서로 낄낄 웃으면서도 걱정이 되긴 했다. 술을 좋아하는 두 놈이 남 일 같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띠리리리리리.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벨이 울렸다.

 “야 우리는 진짜 저러지는 말자”며 걱정의 방향을 우리로 돌리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저분은 지하철을 집 삼아서 어디로 향하고 있으신 걸까? 근데, 저 구두 낯이 익데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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