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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순 Oct 07. 2020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30대 초반, 퇴사의 이유

2차로 자리를 막 옮겼을 때였다. 흔치 않은 순간이 왔다. 모두가 담배를 태우러 나가고 비 흡연자인 P과장과 나만 남겨졌다. 


“뭐 먹을래?”라는, 회식의 2라운드를 알리는 종이 울렸으나 내 눈에는 메뉴가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 잘 사용하던 “선배님 드시고 싶은 걸로 하시죠”를 잠시 뒤로 미뤄둔 채, 많이들 써봤을 것 같은, 하지만 들어본 적은 없는 대답으로 대신했다.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저 회사 그만두려고요.”

“뭐?!”

놀라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P과장은 많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감사하게도.


“과장님께 처음 말씀드리는 건데요, 유학을 좀 다녀오려고요”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게 돼 버렸다. 어렸을 적부터 줄곧 따라다녔던 동네 형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는 P과장은 한동안 계속되는 나의 이야기를 약간의 끄덕임과 함께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술도 한잔 시키지 않은 채로. 


우리의 심각함이 공기의 기류로 전해졌는지, 가정집을 개조해 가게를 예쁘게 꾸민 술집 사장님은 주문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사이 다른 선배들이 하나 둘 들어왔고, “다른 분들한테는 내일 따로 말씀드릴게요”라는 말로 정중히 엠바고*를 부탁했다. 오랜만에 팀원들끼리만 함께하는 술자리가 나의 이야기로 무겁게 얼룩지는 게 싫었다. 


역시 P과장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엠바고는 잘 지켜졌고, 나는 계획했던 대로 선배들을 하나씩 거쳐 팀장과의 면담에 이르렀다. 


“회사에서 잘하고 있는데 어딜 간다는 거야?”

팀장은 특유의 손바닥으로 코를 문지르는 제스처로 나의 선택에 답답함을 표했다.


“잘 생각한 거 맞아? 다시 생각해봐.”

“유학 간다 하고 나중에 경쟁사 가서 일하고 있는 거 아냐?

회사에 입사해 내내 영업만 해온, 심리전의 달인인 팀장은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했다가 허허 웃어 보이기도 하면서 서로 다른 타입의 질문들로 나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근데 뭐 숨길 게 없었다. 나는 좀 특이하게도(?) 회사를 싫어하진 않았다. 업무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영어를 쓰고, 일 년에 네다섯 번은 주말까지 포함된 스케줄로 해외출장을 다녀와야 하는 나의 직무가 꽤나 잘 맞았다. 운이 좋게도 좋은 선배들을 만나 사무실에서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기에 회사 그 자체 혹은 나를 괴롭히는 누군가가 못 견디게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과는 좀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늘을 날아올라 비행기를 조종해보고 싶었던 나의 바람을,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실현시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때, 나는 그렇게 그동안 열심히 모아둔 돈을 내 꿈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둘 때의 시원섭섭함, 나가서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엄청난 두려움, 내 꿈을 향한 약간의 설렘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선택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네가 그럴 줄 알았어. 회사에 있을 녀석이 아니다. 넌 뭘 하든 잘 될 거야” 하고 응원해주는 선배가 고마웠다. “선배는 어떻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실제로 한다는 게 진짜 대단하네” 라며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대화를 훈훈하게 포장해주는 후배 녀석도 고마웠다. 그렇게 사원증을 반납하고 모두에게 인사를 전한 뒤, 회사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취재한 사안을 보도하는 것을 일정 기간 미루기로 약속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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