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봉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피맥 콜?"
피자를 사서 갈 테니 J 네 집에서 맥주 한잔하자는 것이다. 담에 먹자고 계속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제 새벽까지도 이놈들과 술을 마셨다. 오늘 오전 7시에 일어나는데 오랜만에 지옥을 맛봤다. 어제 마셨던 술과 음식들이 위장에서부터 쓸개즙과 함께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고 목 뒷덜미의 혈관이 막혔는지 멍한 기분이 정수리까지 뻗쳐 있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 똑같은 지옥을 맛보기 싫어서 담에 먹자고 완곡히 거절했던 것이다.
분명,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만 해도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밤 10시면 술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가까워오자 이상한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입안으로 흡수되는 알코올과 취기가 몸에 퍼지면서 서서히 올라오는 흥! 꽐라될 때까지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은거 아닌가? 그래! 적당히만 먹고 가면 되잖아. ‘적당히’에 나는 굴복했다. 오늘도 술을 마시면 내일은 지옥일 거라는 생각은 이미 쏙 들어간지 오래다. 오늘은 수요일. 내일만 버티면 금요일이니까!
술을 먹기로 결정했으니 빠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곧장 빨간벨을 누르고 다음역에서 내린 뒤 피맥으로 향하는 버스로 환승했다. 환승이 되니까 1천원을 더 낼 필요는 없었다. 공짜버스표를 받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기부니가 좋아졌다. 발걸음도 가벼워졌고 저녁까지도 떠나지 않았던 멍한 기분도 말끔히 사라졌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곧바로 쏘맥 한 잔을 말았다. 싱크대에서 숟가락을 하나 꺼내와서 삽으로 땅을 파듯이 쏘맥잔 밑둥을 때렸다. 부드러운 기포가, 맥주의 크림이 쏘맥잔에 가득 채워졌다.
우리가 어제도 새벽3시까지 술을 같이 마셨던 놈들이 맞나? 오늘도 술이 술술 들어가고 있었다. 쏘맥잔이 비워지면 그 즉시 바로 채워졌고 한 벽면에 하나 둘씩 오와 열을 맞춰 쌓여가는 빈병들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시간은 또 다시 새벽 3시가 되었다.
“야, 나 죽을 거 같음. 먼저 잘께!”
J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붙잡지는 않았다. 내일 7시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J가 방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잘자’라고 인사를 나눴고 술자리는 봉과 나만 남았다. 다시 쏘맥 한 잔을 하려고 하는데 J가 떠났던 자리에 책이 한 권 놓여져 있었다. 퇴사자의 여행기 같은 책이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무슨 생각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봉를 쳐다봤다. 봉도 이미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한 눈치였다. 봉도 나처럼 퇴사 3년차다. 그 시간동안 비슷하기도 하면서 다른 점들을 고민했을 것이고 이 고민들을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 나는 목적어 없이 봉에게 말했다.
“야 우리도 해볼래?”
“뭘?”
무엇을 말하는지 알면서도 살짝 놀랐는지 봉은 나에게 되물었다.
“책 말이야! 우리도 책 한 권 내보즈아!”
사실, 에세이는 꼭 써보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났다. 둘이라면 서로 다독이기도, 다그치기도 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 때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퇴사한 후 3년 동안 새로운 시도에 대한 결심과 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 기간 동안 한 가지 얻은 교훈은 술이 얹어진 결심은 가벼운 포기로 끝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술기운에 헛소리한 거라고 여기며 가볍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단호한 어투로 봉에게 말했다.
“일단 매주 월요일, 4회만 만나보자. 4회 해보고 계속할지 말지 생각하자!”
오늘로써 ‘일단 4회만 해보자’는 20주 연속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