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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순 Aug 11. 2020

간절한 순간

이놈의 직장

 출근길에 급똥이 왔다. 오랜만에 갈아 마신 토마토 주스가 문제였나. 한동안은 아침에 배가 가벼웠었는데 오늘은 지하철에서 긴급하게 신호가 왔다.


 두 정거장 정도 갔을 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출근길은 5분의 오차만 있더라도 지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타고 있는 지하철은 5호선이지만 회사를 가려면 곧 3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종로3가 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탈 때 가끔씩 들렸던 화장실이 떠올랐다. 풀방일 게 뻔한데.


 만약, 지금 내린다면 최소한 2층은 올라가야 했다. 일을 처리하고 다시 지하철을 탈 때까지의 예상시간 8분. 물론, 화장실이 꽉 차 있지 않다는 조건에서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시간과 나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7시 38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2분. 8시까지 회사에 쎄잎 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나는 지금 5분도 참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 간절하다. 버텨야 한다. 식은땀이 난다. 아랫배가 응축되기 시작한다. 괄약근이 조여 온다. 이놈의 직장.'


 지금이라도 반차를 써야 되는지 고민했다. 1초라도 늦게 출입카드를 찍는다면 지각 처리되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다. 오늘 퇴근 전까지 마쳐야 할 문서작업 4건, 오후 3시에 팀장 보고 미팅. 다행히 오전에는 미팅이 없었다.


“그래!”


오늘은 내 아랫배에게 넉넉히 시간을 주기로 했다. 요즘 내 직장은 항상 과열된 상태였지만 반차를 쓰겠다고 결정하니 속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태진아(가명, 신입사원), 나 오전 반차 좀 올려주라. 팀장님께는 바로 전화드릴게.”


 나는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곧바로 내렸다. 아직 화장실은 멀리 있다고 최면을 걸면서 팀장님께 어제 장례식 때문에 과음을 했다는 어쭙잖은 거짓말을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두 칸씩 계단을 올라갔다. 다행히 화장실 한 칸이 비어 있었고 그곳에 앉았다.


“흡! 어후!”


 직장은 쌓이는 곳이다. 영양소의 흡수와 소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적절히 배설하지 못하면 뻥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20cm의 작고 팽창하는 원통이 내 몸에서 발생하는 큰 배설물들의 임시저장을 책임진다. 요새 들어 대장도 점점 예민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전체 소화기 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 중 약 30% 정도를 차지해 가장 흔한 소화기 질환이 되어버린 이 병. 과민성 대장증후군.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이다. 먼저 자신의 주요 스트레스 요인을 파악하고 이를 줄일 수 있도록 생활 패턴을 바꿔야 한다. 적절한 휴식과 운동을 한다. 식이섬유를 꾸준히 섭취하고 담배, 술, 커피 등 장에 자극이 될 만한 기호식품은 삼간다. 이런 교과서 같은 말들. 이게 당최 가능이나 하냐고! 스트레스, 하루 커피 3잔, 술, 고지방으로 장들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렇게 불평불만을 쏟아낸 뒤 생각난 것은 아침밥이었다. ‘아침밥이라. 뭘 먹지? 라면에 제육덮밥! 김밥천국!’ 배설하는 순간에도 뭘 먹을지 고민하는 내가 조금은 한심했다. 더 한심했던 것은 출근까지 4시간이나 남았는데 아침을 먹으려고 기껏 생각한 곳이 회사 앞 김밥천국이라니.


“여기 치즈라면에 제육덮밥 하나 주세요.”


 이 김밥천국은 지하철로 내 회사를 출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앞을 지나쳐야 하는 곳이다. 직장인들이 쏟아져서 들어가는 길인데 단 10분 차이로 이렇게 한산했다. 묘한 희열을 느꼈다. 쌓였던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 있어서?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난 희열? 다른 사람들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시간에 나 혼자 여유를 즐기고 있어서? 쌓였던 화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숙변이 조금은 해결되었달까.


 젓가락을 집었다. 제육덮밥과 치즈라면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우울감이 밀려왔다. 정장 벨트가 내 배를 받치고 있었다. 궁금증이 생겼다. 벨트는 내 배의 둘레보다 큰 바지를 잡아주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지금은 바지의 용량보다 넘쳐버린 뱃살을 받치고 있을 뿐이었다. 신입 때는 이 바지가 넉넉했었는데 말이다.


 뱃살은 겹겹이 쌓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트 경계 밑으로 축 늘어진 가죽을 보게 될 게 분명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제육볶음을 라면에 싸서 한입 크게 넣었다. 맛있었다. 그래~ 일단 먹자. 나는 목을 조이는 넥타이 뭉치를 오른손으로 길게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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