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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순 Aug 24. 2020

2개월만의 하동관

퇴사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현장에 오면 생활이 좀 나아 질 거라고 생각했다. 일할 땐 오로지 일에 집중하고 저녁에는 1~2시간의 개인시간을 갖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물론, 내 착각이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이런 느낌이었던 걸까. 일에 미친듯이 열중하다가 번아웃 되어 쓰러져 있는 상태의 무한 반복.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강도 높은 반복이었다.

 반복이 나쁜 것은 아니다. 반복의 질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삶의 어떤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였고 애초에 나에게 불리한 게임이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누군가가 반대편의 시소에 앉아있고 나는 내려 달라고 허공에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면에서 그 덩치는 나를 보고 낄낄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선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새벽 6시 20분, 현장으로 가는 출근차에 올라탔다. 그날따라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내가 계속 살 수 있을까? 진짜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이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온몸에 긴장이 곤두섰다. 마음에서 어떤 충동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고 쌓여 있는 메일들을 확인했다. 그 메일들을 천천히 읽으며 당장이라도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문장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리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그 길로 곧장 현장소장 사무실로 걸어갔다.

 소장실의 화이트보드에는 회의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현장소장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라도 창문을 깨부수고 탈출하고 싶었다.

이미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현장소장에게 말했다.

“소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2개월만이었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던 곳은 명동의 유명한 곰탕집이었다. 이렇게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을 계획은 아니었다. 두 녀석은 테이블을 미리 맡아 두고 있었다. 나는 긴 줄을 가로지르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곰탕이 나왔다. 맑은 국물에 푸짐한 고기 건더기. 나는 파를 한 움큼 털어 넣었다.


 푸석해진 얼굴과 M자가 드러난 이마, 살이 빠진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써 다른 질문은 하지 않으려던 것 같았다. 나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이 행동으로 친구들에게 질문할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두 녀석은 그냥 내 옆에 있어주었고 그게 무척 고마웠다.

곰탕을 다 먹어 갈 때쯤 한 친구가 입을 뗐다.  


“진짜 그만 둘꺼야?”


 회사를 다닌 지 정확히 만 3년이 되는 날, 나는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섬으로 건설현장 파견을 갔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 섬을 보르네오라고 불렀다. 이곳의 건기는 6월쯤 시작하고 10월이 되면 우기로 바뀌었다. 건기엔 미칠 듯한 햇빛이 살을 태우더니 우기에는 거짓말처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하루 종일 쏟아졌다. 섬 내륙에는 원시 농업과 수렵에 의존하는 부족들이 살고 있어서 회사 선배들은 화살을 쏘는 식인종이 있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몇 달간 계속되는 폭우에 건설현장의 일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들이 쏟아질텐데 해결되지 않는 일들만 점점 더 늘어났다. 쌓임의 연속. 게다가, 내 정면으로 다가오는 책임과 비용에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었다.


 성과를 위해 주, 월, 분기, 년 단위의 계획을 구상했지만 실시간으로 터지는 일들을 대처하기도 버거웠고 현장은 실패를 눈감아 주지 않았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버티는 것뿐이었다. 하루에도 감정이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고 현장 직원들 각자가 버티는 방식이 서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사직서를 내겠다는 넋두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건설 현장에서, 인도네시아 인부들


  현장에 오면 생활이 좀 나아 질 거라고 생각했다. 일할 땐 오로지 일에 집중하고 저녁에는 1~2시간의 개인시간을 갖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물론, 내 착각이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이런 느낌이었던 걸까. 일에 미친듯이 열중하다가 번아웃으로 쓰러져 있는 상태의 무한 반복.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강도 높은 반복이었다.


 반복이 나쁜 것은 아니다. 반복의 질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삶의 어떤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였고 애초에 나에게 불리한 게임이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누군가가 반대편의 시소에 앉아있고 나는 내려 달라고 허공에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면에서 그 덩치는 나를 보고 낄낄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선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새벽 6시 20분, 현장으로 가는 출근차에 올라탔다. 그날따라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내가 계속 살 수 있을까? 진짜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이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온몸에 긴장이 곤두섰다. 마음에서 어떤 충동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고 쌓여 있는 메일들을 확인했다. 그 메일들을 천천히 읽으며 당장이라도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문장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리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그 길로 곧장 현장소장 사무실로 걸어갔다.


 소장실의 화이트보드에는 회의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현장소장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라도 창문을 깨부수고 탈출하고 싶었다.


이미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현장소장에게 말했다.

“소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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