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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Dec 30. 2021

눈이 오면 찾아가겠어요

눈이 오면 찾아갈 곳 있으신가요?

포틀랜드에도 눈이 왔다.

여행자 말고 생활자로의 눈은 처음이다.

눈 때문에 운전하기 위험하지만 그래도 도서관에 왔다.

옆 차의 할머니가 차에 타면서 도서관 문 닫았다고 알려줬다.

공지되지 않고 문을 닫은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갑작스러운 휴관은

 '이렇게 멋진 눈이 왔는데 고작 도서관에 온 거야?

얼른 자기만의 천국으로 가서 이 눈을 즐기시오'라는 말 같았다.


눈이 귀한 도시 부산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눈이 왔다는 사실 하나에

전교생이 수업 대신 운동장으로 나가서 뛰어놀았다.

그래 그게 눈에 대한 예의다.

눈이 오면 일상을 멈추고

찾아갈 곳 하나쯤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었다면 남산이나 한강에 갔을까?

매일 가는 공원에 그냥 가기엔 좀 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구글 지도를 펴서 이 근처 젤 큰 공원을 뒤졌다.

역시 공원천국이라 너무 많아서 정하기 어려웠다.

그냥 끌리는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TUALATIN HILLS PARK에 도착했더니

마치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에 온 느낌이었다.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은 아스팔트라 이미 눈이 녹아있었고

오로지 자연의 역영만이 내린 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혼자 산책하기 좋은 코스였다.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 조차 필요 없었다.

그곳의 고요한 침묵이 킬링 포인트였다.

나 말고 혼자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눈이 내려 공기가 상쾌했고 나무들의 녹색과 그 위에 내린 생크림이

마치 녹차 케이크 같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곳을 뛰는 러너들이 있다는 거였다.

미로처럼 길은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는데

사진을 찍느라 한눈을 팔다 보면 금세 쌩 하고 누가 나를 스쳐지나

뛰어가고 있었다.

행운의 신이 날 여기로 보내려고 도서관 휴관 시켰나 보다.


큰 스토리보다, 작은 에피소드

저녁엔 집에서 <섹스 앤 더 시티> 후속 편 <그리고 그냥 그렇게>를 봤다.

갑자기 캐리의 남편이 죽는 걸로 극적인 스토리가 전개됐다.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준 부분은 굵직한 서사보다는

아주 작은 따뜻한 에피소드였다.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집, 커피 머신마저 거품을 뿜고 고장이 나버린다.

곧장 캐리가 간 곳은 뉴욕의 화려한 카페가 아니라 집 앞 작은 그로서리에 간다.

“웰컴백”

그 인사가 정말 좋았다.

그 평범한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 내게는 최고의 씬이었다.

단골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그 인사말이다.

캐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주인은 캐리의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는다.

최근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담담히 전하는 캐리.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의 위로 말고

적당한 거리의 사람에게 받는 위로엔 특별한 온기가 있다.

가게 주인은 커피를 공짜로 내어준다. 그리고 롤빵을 건넨다.

단골가게만이 주는 위안이 있다.

단박에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 책이 생각났다.

말 그대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고야 마는 위안이다.

엉망징창인 날, 절대로 실패 할리 없는 단골집이야 말로

인생에서 정말로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내게도 그런 단골 가게가 있었다.

서교동에 살 땐 <훈고 링고 브레드>였는데 포틀랜드에 와서는 아직 없다.

고작 스타벅스에 가는 게 다다.

그래도 여기서도 언젠가 그런 단골집이 생겼으면 하는 로망이 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게 단골집이 되고 싶은 가게가 생겼다.


단골집과 일생일대의 만남

연말이라 남편과 나는 식당 하나를 예약했다.

둘 다 시푸드를 좋아해서 무작정 시푸드로 검색해 알아낸 곳이다.

그런데 문 앞에서 알았다. 예약이 안 되어 있음을...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며 메일을 다시 체크하고 있는 사이

내가 가서 빈자리가 혹시 없냐고 물었다.

예약하기 힘든 식당이었지만 운 좋게 자리가 있었다.

입구엔 단체 테이블에서 시킨 것으로 보이는 케이크들이 놓여있었다.

그게 내 눈을 사로잡았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꼭 디저트를 먹어봐야겠다 싶었다.

직원 유니폼도 내 스타일이었다.

삼성병원과 키엘을 연상시키는 흰색 가운에다가 보타이라니,

유니폼이 뭐가 이리 멋져?

은은한 실버 컬러 쇼트커트 할머니가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다.

내 눈엔 시상식장으로 가야 할 배우가 잘못 온 것 같았다.

혹시 몰래카메라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묘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굴과 깔라마리 연어스테이크를 시켰다.

조명도 적당했고 벽에 붙은 사진들마저 내 스타일이었다.

적당히 심플한 그릇이나 포크, 테이블에 깔린 시트의 질감까지도

다 내 마음에 들었다.

너무 시끄러웠던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이곳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까지도 딱 적당했다.

내가 시킨 블루베리 레몬 드링크가 늦게 나왔다.

서버 할머니는 바텐더가 새로 와서 음료를 다시 만드느라 늦어졌다고

사과했다. 음료가 늦은 그 이유까지도 좋았다.

식사는 물론 여기까지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었다.

식사를 하고 디저트 메뉴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식당엔 디저트 메뉴판이 없단다.

그러더니 디저트가 플레이트 된 큰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와 여기는 모형을 직접 가져와서 보여주는구나.”

모형을 너무 똑같이 잘 만들어서 업체 전화번호를 물어볼뻔했다.

크림 뷔릴레로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나오는 길,

아까 처음에 들어왔을 때 봤던 그 자리에

디저트 플레이트가 있었다.

누군가 주문한 플레이트가 아니라 첨부터 내가 본건 그 샘플 플레이트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그 케이크를 슬쩍 만져보았다.

그런데 그 케이크는 모형이 아니라 진짜였다.

‘여기 정말 디저트에 진심인 곳이구나 ’

촉촉한 케이크의 질감이 내 손으로 전해졌다.

왜 처음부터 우리는 그걸 모형이라고 생각해버린 걸까?

그만큼 때 묻어 버린 걸까?

나올 때 내가 만져보지 않았다면 평생 오해할 뻔했다.


나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듯 기뻤다.

“오빠 이거 진짜 케이크이야.”

나는 남편에게 이 놀라움을 전하며 재빨리 가게를 나왔다.

그런데 뒤따라 나오는 남편 손에 피가 흘렀다.

헉 알고 보니 블루베리 케이크에서 묻은 소스였다.

나는 조심히 만져보는 편인데 아무래도 이 인간은 케이크 다 망가뜨리고 온 것 같다.

근데 왜 남편에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분명 같이 놀았는데 친구가 더 재밌게 논 것 같은 요상한 약 오름.


어른이 되면 ‘다 안다고 생각되는 것’ 투성이다.

케이크를 만지는 순간만큼은 눈을 만질 때 좋아하던 어린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혹시라는 호기심이 다시 살아난 순간이다.

분명 춥지 않은 봄날 같았는데

주변은 온통 눈으로 뒤덮였던 그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식당 밖 바로 앞에선 두 명의 종업원이 바닥에 있는 철문을 열고 있었다.

바닥에 하수구 말고 다른 게 있다는 건가? 신기했다.

그 안에서 거짓말처럼 빛이 새어 나왔고

남편의 설명으로는 아마 그 안에 식재료를 보관해 두는 것 같다고 했다.

가까이 가서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사다리 같은 게 있어서 밑으로 내려가는 걸까?

뭔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게 있을 것 같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내가 모르는 세계는 얼마든지 있다.


내 단골 식당은 이제 여기로 정했다.

1892년에 문을 열었다는 이 전통 있는 식당은 어지간해서는 없어질 리 없다.

모든 불황을 다 겪으며 살아남은 식당이다.

아니 그 숫자가 아니더라도 오늘 이 식당에서의 내 경험이 보증한다.

모형이라 오해해서 미안했고

언제나 지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눈이 오는 날마다 여기 찾아오고 싶다.

아니 내 인생에 눈이 오는 날마다 여기에 오고 싶다.

여기에 자주 오기 위해서 눈사태처럼 특별한 일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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