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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an 19. 2022

마스다 미리가 우리를 살게 할 거야

마스다 미리의 팬으로 산다는 것

<마스다 미리>라는 어쩔 수 없는 세계

“오늘 또 인생 책이 바뀌어 버렸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끊임없이 역대급을 찍는다는 거

내게는 커다란 행운이다.

가장 최근작이 전작보다 완성도가 떨어질 수도 있고

실망을 시킬 수도 있는데 말이다.

슬럼프도 빠지고 운이 나쁘기도 하도

삐끗하기도 할 텐데

한 결 같이 내 기대를 저 버지리 않는 작가가 있다.


최애 작가의 신작을 읽을 때 살아있는 걸 느낀다.

이렇게 최고를 쓰고 나서도

그걸 뛰어넘는 최고를 또 신상으로 만들어 냈다는 게 경이 롭다.

그 작가를 추종하는 나 자신도 같이 최고점을 찍어 나가야 할 듯한 압박이 든다.

최근 <안나의 토성>을 읽고 스스로 계속해서 자기만의 우주를 확장하는

마스다 미리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 어떤 작가와도 비슷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문장을 써 내려간다는 점이 압도적이다.

몇 줄만 읽어도 ‘이건 마스다 미리가 쓴 거잖아’라고 티가 나는 고유함.

그 독보적인 면모가 오늘도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이미 다른 궤도를 선택했음에도 자꾸 전에 돌던 궤도에 기웃거린다.

“누군가 잘 나가는 프로그램을 맡았데!” 이런 소식을 들으면

'내가 계속 그 세계에 있었다면 나도 그런 영광을 누렸을 텐데!' 같은

어이없고 쓸데없는 아쉬움이 하루를 망치려 든다.

왠지 그러면 마스다 미리를 좋아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독보적인 문장이 잔뜩 들어있는 마스다 미리 만화책을 꺼내 든다.

그리고 다시 자기만의 하루에 몰두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는 늘 일상이 묻어있다.

뭔가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작고 시시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뜻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한국어로 된 책을 주문해서 봐도 되고 안 봐도 된다.

그런데 사악한 배송비와 불편한 기다림을 감수하는 이유는

내게 진짜 중요한 책이란 뜻이다.

책의 단단한 물성과 그 작가가 그려낸 세계를 오롯이 마주하고 싶은

욕망이 내겐 더 크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는 뒤돌아서면 신간이 나오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된다.

(한국에 나온 번역서 기준으로 작년에만 8권 출간)

바통을 넘기는 달리기처럼 내 손에는 <안나의 토성>이 들려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딱 한번 만이라도> 신간을 주문한다.

이건 도저히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빠르기가 아니다.

설마 마스다 미리, 한 사람이 아닌 거 아닐까?

여러 명의 그룹일지도 몰라! 이렇게 많은 걸 혼자서 이렇게 빨리 해낼 수 없어!


마스다 미리는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다 미리가 우릴 살게 할 거야!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라 AI?

알파고처럼 바둑은 이길 순 있어도

글 쓰는 AI가 작가를 이길 순 없다고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다.

작가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기계는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인간만이 죽는다는 한계가 있고 또 그렇게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말이 딱 맞았다.

마스다 미리는 늘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째서 나도 가끔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을 기가막히게 잘 아는 걸까?



이렇게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어

나는 우주의 신비를 해명하고 싶다는 갈망보다

사실은 오늘 본 아름다운 별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은 갈망이 큰 것 같다고.

                                             <안나의 토성> 중에서


그래 이런 문장을 도저히 기계 따위가 쓸 리 없지.

이 섬세하고 따뜻한 문장은 인간만이 쓸 수 있다고!

잔잔하게 계속 마음에 남아

그 기운으로 사람을 일으켜세우고야 마는 요상한 감각.

언젠가 마스다 미리를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이 샘솟는 감수성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어떻게 알게  건지?

한국인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빨리 하는 건지?


내 안에 <마스다 미리> 흔적이 있다.


그런데 어지간한 작가들은 다 얼굴이 알려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작품에 커다랗게 얼굴이 박혀 있다.

물론 최근 모습은 아니지만 아주 선명한 인상이 남았다.

혹시라도 그들을 우연히 마주친다면

뒷걸음치면서 혼자 흥분한 얼굴로 “설마..”하겠지만

도저히 마스다 미리는 얼굴을 알 길이 없다.

대신 눈앞에 초등학생들이 하교하는 귀여운 장면이 펼쳐지면

물끄러미 관찰한다던가

그걸 그리거나 메모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 마스다 미리가 아닐까 하고 의심이 되곤 한다.

(50대이지만 40대로 보일 것만 같다.)

혼자 여행 중이지만 머릿속에 수많은 말풍선을 띄우고 있을 것만 같다.


아직은 마스다 미리의 얼굴을 모른 채 상상만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수줍) 팬이에요! 미리님의 책을 읽고 비로소 ~”

뒤가 없다. 자랑거리가 없어서 못 만난다.

뒤는 아주 뻔지르르하고 겉멋이 잔뜩 들어갔으면 한다.

어떤 가수를 좋아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를 갔다는 식의 레퍼토리 말이다.

물론 마스다 미리라면 그 뒤가 없어도 팬이라는 자체 만으로도 좋아하겠지만

마스다 미리의 찐 팬이라면 그의 성실 함대로 살아내야 한다. 그게 덕질의 본질 아닐까?

'내 안에 당신의 흔적이 여기 있어요!'

그게 바로 팬 인증이다. 그렇지 않다면 좋아할 자격이 없다.

마스다 미리처럼 살아냈다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또 뭐라도 되지 않으면 어때!

나는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속으로 말하겠지

여기예요 여기에 있으니까,  발견해 주세요’ <안나의 토성 P194>


오늘도 마스다 미리 책에 밑줄을 그으며

그룹인거 아냐? 사람이 아닌 거 아냐?

이런 의심들이 서로 마구 부딪히며

언제가 만나게 되는 날이 오겠지? 하고 상상하는

이 순간이야 말로 가장 살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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