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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an 24. 2022

나도 죽으면 이렇게 벤치 만들어 줄 수 있어?

어디서 본건 많아가지고

강아지는 못 가는 공원이 있다고?


해가 떴다!

포틀랜드 겨울에 해가 뜨면 뭐다?

바로 공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도서관으로 처박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 코스가 몇 군데 있는데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간다.

오늘은 눈이 펑펑 내린 날 즉흥적으로 발견한 코스로 달려왔다.

첫 만남이 눈 덮인 채였기에

눈이 싹 녹은 공원은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가부키 화장을 지운 맨얼굴이랄까?


눈이 녹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휠체어나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무 데크와 아스팔트 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자전거나 스케이트 보드도 가능하다.

코스 끝에 있는 표지판에 강아지가 그려져 있길래

여기도 강아지 공원인가 하구 가까이 가봤더니 대반전!

강아지는 올 수 없는 공원이란다!

포틀랜드는 강아지 공원으로 유명한데

노 키즈 존처럼 노 강아지 공원도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강아지들이 이 공원의 벌레나 다른 생태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늘 익숙해서 당연하게만 여겼는데 아닐 수도 있구나!

이런 배려가 난무하는 공원이라니

왠지 더 이 공원이 특별해졌다.


운명의 벤치와 다시 만나다

눈 오는 날 왔을 때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제대로 읽지 못한

벤치 위의 문구도 제대로 읽어 봤다.

뉴욕 벤치엔 보통 공책에 베껴 쓰고 싶은 멋진 말들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도 그러겠거니 하고 봤는데

세상에! 먼저 세상을 떠난 와이프의 이름이 있었다.

로맨틱 끝판왕이다.

그녀도 공원을 좋아했겠지?

가을에 태어나 겨울에 떠났구나

내 와이프를 기억하며

베스 린 앤드 웰  19631015-20141113 뉴욕 태생

그녀는 항상 이 공원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내가 오늘 이 벤치를 다시 만난 건 운명이다.

그 많은 벤치 중에 이 벤치를 다시 만나다니

사진첩을 뒤져보니 눈 오는 날 이 벤치에서 찍은 똑같은 사진이 있었다.


커다란 행운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일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다는  어떤 걸까?

그 잔혹한 작별을 겪는 다는 거.

“너희들한테는 다 해 준거 같은데

너네 엄마한테는 못 해준 게 너무 많다. “

아빠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해 보려 해도 헤아릴 길은 없다.

내가 생각해도 엄마가 아빠에게 해준 게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단 한 번도 엄마가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내 놓지는 않았지만

매번 엄마가 아빠에게 져준다는 느낌으로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어린 시절 한 장면이 있다.

엄마는 늘 집에서 오이마사지를 하면서 피부를 가꿨는데

아빠에겐 항상 비밀로 하라고 했다.

‘왜 비밀로 해야 하는 거지?’

어린 나이의 나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아빠한테 다 까발려 버리면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알 것 같다.

아빠는 그냥 존재 자체 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사람이라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해도 그냥 존재 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해준 거라고.


한 사람이 인생을 통틀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로 큰 행운이다. 매순간 져 줄수 있는 존재라니…

그 커다란 행운을 분명 엄마가 가졌었고 나는 가까이서 그걸 목격해왔다.


벤치에다가 뭐라고 쓰지?


아침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는 말이 있다고 스티브 잡스가 말했다.

‘오늘 죽을지도 몰라’

어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라는 알람 어플을 맞춰놓고

그때그때 그걸 상기시킨다고 했다.

갑자기 오늘 그 공원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남편한테 서둘러 이걸 부탁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죽으면 이렇게 벤치 만들어 줄 수 있어?”

못생긴 납골당보다 이런 로맨틱한 벤치라면 괜찮을 거 같다.

오늘 그 완벽한 레퍼런스를 만나고야 말았다.

이거 누구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너무 마음에 들어서 90도로 인사할 뻔했다.

딱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사진으로 설명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

누군가가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앉아 있다가 가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노래<두사람>의 가사처럼 이런 벤치라면 서로의 쉴곳이 영원히 되어 줄 수 있겠지?


그런데 사람인지라 자꾸 욕심이라는 게 생긴다.

아니 남편이 엄한 거 써넣을까 봐 문구까지 내가 다 컨펌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

난 그냥 이름이나 출신지 같은 세상 사람들이 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말고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써넣고 싶다.

이왕이면 읽은 사람 웃음이 터지면 더 좋고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같은 류)


언제나 유머를 중요시 여기는 척했으나

사실은 돈과 명예에 집착해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어디서 본건 많아가지고 겉멋 부리는 걸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쫄보라 전전긍긍하는 데 시간 다 썼다.


좋긴 한데 이렇게 구질구질 길면 뽀다구가 안 난다.

이 별것도 아닌 걸 궁리하며 적어 나가 보니

요상하게도 지금 내 인생에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생각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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