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엔 아이스크림 산이 있다
날씨가 좋으면 포틀랜드 시내에서 하얀 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린 시절 부산 살 때 대마도가 보이던 날처럼 그런 날은 괜히 기분이 좋다.
내 시력에 딱 맞는 안경을 갓 맞춘 느낌이다.
정식 이름은 후드 산이지만 우리는 아이스크림 산이라고 부른다.
진짜 부드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다.
눈 전체가 온통 뒤덮인 산을 보는 건 신기한데
여름에도 그 자태가 유지되는 건 더 신기했다.
인천공항에 출국하지 않아도
굳이 가서 비행기 이착륙 구경하고 점심 먹으러 가는 사람이 나다.
그런 기분으로 아이스크림 산 스키장을 갔다.
스위스에 가본 적은 없지만 영상으로만 봤던 스위스가 거기 있었다.
30개의 슬로프가 있는 거대한 스키장에서
모두 각자 자기만의 속도를 즐기고 있었다.
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안 된 꼬마 아이들이 스키를 타고 있는 게 신기했다.
나는 겨우 서른 넘어서 보드를 처음 타봤고 스키는 한 번도 안 타봤다.
왜 그랬을까?
그동안 너무 먹고살기 바빠서?
이렇게 자연을 즐기면서 돈 벌었으면 조금 덜 지쳤을까?
어린 시절의 감각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중하다.
어른이 돼서 배우는 것과 어린 시절에 배우는 건 결이 다르다.
어른은 주입해야 한다면 어린이는 그냥 스며든다.
내가 어린 시절에 스키를 배웠다면
스키 시즌권 끊고 눈의 맛을 즐기는 어른이 됐을까?
스키장에서 스키보다 더 재밌는 거
결과론 적으론 나는 스키를 타는 어른보다
스키 타는 걸 구경하는 게 더 편한 어른이 됐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올라가는 리프트를 물끄러미 넋 놓고 보는데
마치 사람들의 모습이 악보의 음표처럼 보였다.
그리곤 한 친구가 떠올랐다.
계절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서울대공원에 리프트를 타러 가는 친구다.
보통 리프트는 엘리베이터처럼 이동하기 편하라고 타는 건데
그 친구는 그 리프트 자체가 좋아서 서울대공원을 가는 사람이다.
풍경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 친구를 여기에 꼭 데려오고 싶다.
아마 저 리프트 타려고 스키를 타는 걸 감수할 사람이다.
스키를 타지 않아도 구경만 하는데도 시간이 훌쩍 흘렀다.
해가 지려해서 주차장으로 빠져나오는데
어떤 할머니가 해치백 차 트렁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눈빛에 낭만이 뚝뚝 흐르는 순간이었다.
시선은 아이스크림 산을 바라보면서 자기만의 스키 애프터를 즐기는 듯했다.
그 모습에서 도쿄에 살 때 도쿄 타워를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도쿄타워.
그 당시 마음이 힘들 땐 그냥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솟은 도쿄타워를 보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서곤 했었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우리도 다음엔 김밥 싸와서 아이스크림 산을 보면서 저렇게 먹자고 했다.
남편은 다음엔 와서 보드를 타자고 했다.
집에 몇 년째 처박혀 있는 보드를 꼭 꺼내오고 싶다고 했다.
아니 난 벌써 다음에 할 거 정해 놨는데?
슬로프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눈보라 체이스>를 읽을 건데?
오디오 북으로 들었던 그 책을 꼭 다시 텍스트로 읽고 싶어졌다.
살인 용의자가 된 주인공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스키장 비밀 금지구역에서 만났고 서로 이름도 모르지만
스키에 미쳐있고 눈의 맛을 안다는 공통점이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그걸 즐기지 않으면 손해죠
즐길 수 있는 소설을 쓰지 않는 다면 그것도 아깝지요
그래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 소설도 숨 막히게 재밌었지만
작가의 말을 읽는데 마치 나에게 이렇게 다그치고 있는 것 같았다.
'포틀랜드에 산다면 그걸 즐기지 않으면 손해죠
즐길 수 있는 소설을 쓰지 않는 다면 그것도 아깝지요
그러니 쓰세요'라고
책 보다가 남편이 보드 타는 거 구경하다가
그게 내가 생각하는 스키장을 즐기는 완벽한 방법이다.
우리가 하와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와이키키 해변에서 난 누워서 책 보고
남편은 서핑하고 난 그걸 구경하는 둥 마는 둥 하던 그 나른한 오후처럼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주는 선물
돌아와서 촬영한 동영상으로 브이로그를 편집하는데
눈 보느라 한눈 팔려 미처 포착하지 못한 장면을 발견했다.
큰 창으로 온통 하얀 눈이 보이는 스키장 바에서 나는 생맥주를 주문했다.
남편이 햄버거 주문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창밖의 리프트를 배경으로 그 맥주를 아이폰으로 찍었다.
그때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몰랐는데 동영상을 다시 보니 맥주에 방울이 맺혔다가 터졌다.
왠지 맥주가 '지금!'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우와 맥주가 방금 방구 뀌었어!”
우리는 그걸 ‘맥주방구’라고 불렀다.
그냥 그 순간이 너무 애틋해서 계속 돌려봤다.
맥주방구가 나를 압도했던 이유는
‘브이로그 안 찍었으면 이 귀여운 걸 몰랐을 뻔했잖아!’ 하는 아찔함이다.
브이로그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가끔은 그만둘까 하다가도 꾸역꾸역 하길 역시 잘했어!
물론 이런 순간은 많았겠지만 그걸 알아채는 여유가 없었던 걸 거다.
이미 많은 행복들이 일상에 흩뿌려져 있는데
너무 많아서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맥주 방구쯤은 만끽하는 속도 살고 싶다.
내 유튜브는 구독자도 적고 광고도 물론 없다.
수익이 나도 그만 안 나도 그만이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즐겁게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 유트버도 책 광고를 받지 않는 이유가
그걸 받는 순간 좋아서 하는 마음이 손상되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완벽한 스타일이라 한번 하면 제대로 해야 하잖아”
한때 유튜브 전도사였던 내가 브이로그 하는 걸 추천했을 때
이 말을 하면서 시도도 하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 속으로 나를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가 맞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그런데 나는 오늘 그 친구가 절대 평생 모를 무언가를 발견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나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는 자체로 충분하다.
아니 어쩌면 매일 이 미국 땅에서 내가 듣는 흔한 말 “펄펙!”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맥주방구, 이걸로 완벽하지 않아?'
브이로그를 찍으면서 흩어진 나의 순간들이 연결된다.
나중에 그게 다 연결되면 무엇이 될지 지금의 나로 썬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내 일상을 다른 각도에서 되돌려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완벽한 셀프 선물이다.
https://youtu.be/IrqkGcVTv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