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드라는 장르

feat. 시적허용

by 보리차

지난번 우리가 오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이 든 시엄마는

시아빠 편에 오이 한 박스를 보내셨다.

난 그걸 보자마자 뒷걸음칠 쳤고

“진짜 손 너무 크시다”를 연발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 뒤에 찾아 올 참사를

오이 한 박스 사태를 남편에게 공유했고

가정집에서 이걸 어떻게 다 먹냐고 했다.

사실 지난번 시엄마가 사다 놓고 간 과일들을

우리는 울면서 버려야 했다.

음식을 버리는 건 죽기보다 싫다.

내가 왜 이런 걸로 고통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 고통은 그렇다 쳐도

시엄마가 평균적인 감각을 잃고

기괴할 정도로 음식을 많이 사는 건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남편은 너무 양이 많다고 아무 생각 없이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이때 정말 시아빠도 우리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양이 너무 많지?” 이럴 줄 알았다.

그게 보통사람의 의견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뭐가 많아?” 라고 하는데 갑자기 공기가 서늘해졌다.

공포영화의 흔한 도입부처럼 설명할 길 없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내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음식이 상하더라도 마음을 지킨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버린다.

한국이었으면 친구나 이웃이랑 나눠먹을 수 있지만

미국 사람에게 오이를 줄 순 없다.


둘째, 음식 상하는 거 보다 마음 상하는 게 낫다.

이걸 상하기 전에 다 먹으려면

1인당 하루에 5개씩을 먹어야 한다.

보통사람의 기준으로 이 양은 너무 많다고 논리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앞으로 이런 일로 고통받을 일은 없다.

자신을 지키는 용기는 이럴때 꺼내야 한다.

난 이게 더 인간다운 삶인 거 같다.

갈등을 피하는 건 로봇이다.

인간이기에 지지고 볶고 감정이 부딪히는 거 아닐까?


나는 친구에게 긴급 SOS를 쳤다.

자기도 지금 시댁에서 준 음식으로 냉장고가 미어터진다고 했다.

오이 한 박스의 놀라운 양에 같이 공감해주길 바라며 열변을 토했다.

친구가 내려준 결론은 시엄마 음식이 입에 안 맞는 사람도 있으니

그거에 비하면 행복한 거라 했다.

그러니 그냥 군말 없이 받고 감사하다 말하라는 거였다.


결혼 10년 차 시스타는 내공이 달랐다.

이 긴급 사태를 두고 가장 먼저 할일은 양념장을 만들라 했다.

키친타올로 싸서 오이를 보관하고 그때그때 무쳐 맛있게 먹으라 했다.

(미리 무치면 물이 생겨 맛이 없어지는 게 포인트)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조언이

지레 얼어붙은 나와 죄없는 오이를 동시에 구했다.


시스타는 이 사건에 새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일단 오이가 많다 적다 개인의 의견을 낸다는 것에

어른들은 기분이 나쁠 수 있다는 거라고 했다.

생각 문화 태도 다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토 다는 걸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건 여기서 오이가 많다 적다의 가늠이 아니라

사랑해서 오이를 주는 건데

그런 시엄마의 행동에 크리틱(지적질)을 했다는 점이라 문제라 했다.

시스타의 이 논리적이고 뼈 때리는 설명을 들으니

내가 그동안 시월드라는 걸 오해하고 있었다.

역시 시엄마와 친구같은 건 될 수 없는 걸까?

시월드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머리로는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요상한 곳이다.


평소 시스타가 내게 시월드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는 무조건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라 했었다.

그 당시 나는 시월드가 뭔지도 몰랐고 전혀 공감해 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오이 소동을 겪으며 제대로 깨달았다.

시월드가 뭔지 몰라 우왕좌왕했던 우리들에겐 이 주문이 필요했다.


‘이 장르에서는 시적 허용처럼

상식에 맞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두는 게 묘미다.’


누가 나한테 시월드에 대해 상담해 온다면

저 주문을 외치며

“그런 걸 그대로 둔다고 해서 죽지 않아”라며 여유를 부릴 거다.

꼭 지지고 볶는게 인간적인게 아니라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세상'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다운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음식을 지킬지 마음을 지킬지

둘 중 어느 게 최선의 선택인지 였다.

시스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했다.

남편한테 이 오이 소동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였다.

이 일로 가장 괴로운 건 남편이고

나 몰래 평생 오이 제발 보내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이런 걸 겪어도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좌절할 거라고 했다.

단 한 번도 남편의 시각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머 오은영 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라며 시스타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 인사이트가 놀라웠다.


시월드는 내 결혼생활의 일부이고

그 일부로 인해서 더 소중한 걸 놓쳐선 안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감정을 보살피고 케어하는 게 우선이다.

시스타 조언대로 오이 사건을 더 이상 꺼내지 않는 임무를 완수했다.

오늘따라 자고 있는 남편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린다.

아주 힘든 하루를 보낸 걸로 짐작된다.

비염 때문에 입으로 숨 쉬는 모습이 조금 애처롭다.


갑자기 어디서 전쟁난듯 대포가 터졌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사람이 자면서 저런 힘찬 방구를 뿜을 리 없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명랑한 방구소리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깨끗하게 잊게 했다.

마치 내 걱정을 비웃듯이 아주 평온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끊임없이 나를 놀라게 하는 생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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