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오징어 게임
결혼도 처음이고 미국도 처음, 이번엔 첫 명절이다.
일찍 일어나 한인마트에 가서 송편을 샀다.
늦잠 자고 일어난 남편이
“오늘 꼭 할머니 집 가야 해?”
가기 싫어서 개수작을 부린다.
누가 들으면 우리 할머니 보러 가는 줄 알겠다.
시엄마의 엄마, 남편의 외할머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자진해서 간다.
왜냐면 그 마음이 진심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정말 사정하고 어르고 달래서 시댁에 가는 인간, 여기 있다.
명리학에선 '사주에 뿌리가 있다 없다'라는 말을 쓰는데
뿌리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내가 힘을 발휘하는 건 정말 천지 차이다.
나는 이제 내 뿌리를 확인하고 그 존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됐다.
예전엔 명절을 극혐 했다.
특히 지방이 고향인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려서
뭔가 항상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서울 친구들이 느긋하고 평온하게 명절을 보낼 때
우리는 알 수 없는 무언가 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길에 돈과 시간을 뿌려야 했다.
항상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을 안고 살았던 거 같다.
내 맘이 내켜서 간다기보다는 요상한 의무감에 억지로 가는 게 명절이었다.
그랬던 내가 남편을 끌고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내가 아끼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간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100세 할머니 앞에서는 마흔 넘은 손자도 어린이가 된다.
남편은 배를 벌러덩 까 삐죽 내밀어서
“할머니 나 결혼하고 살쪄서 배 나왔어.”
할머니가 흐뭇하게 보더니
“아우 그 정도도 안 나오면 어떡해” 하신다.
역시 할머니의 다정한 말은 그냥 힘이 난다.
할머니에게 티는 안내지만 나는 할머니의 역사를 조금 알고 있다.
젊은 시절 월세를 받고 살 정도로 넉넉했는데
그걸 자식들에게 일찍 나눠줬다고 했다.
뒤는 흔한 막장드라마였다.
서로 할머니를 안 모시겠다고 해서
이 국 만 리 미국 요양원까지 오신 거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할머니를 앞에 두고 칼부림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그 스토리 때문에 나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어머니는 열두 명의 자식을 키울 수 있지만,
열두 명의 자식은 어머니 하나를 돌보지 못한다.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책에서 읽은 그 구절이 떠올랐다.
미국 요양원 아파트 앞에는 늘 할머니들이 나와 앉아있다.
코가 날카로운 러시아 할머니도 있고 눈이 파란 독일 할머니도 있다.
늙음이라는 자체도 외로울 텐데 타국에서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쓸쓸할까 싶다.
할머니 방에는 오래전에 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그 사진 속 시엄마는 여고생이다.
소녀시절의 시엄마를 만나다니 낯설고 왠지 푸근하다.
"이분이 그 막내 외삼촌 맞지?"
우리 집과 시댁은 분위기부터 세계관 모든 게 달랐지만
놀라운 부분에서 비슷한 점이 있어서 한바탕 웃었다.
바로 집안에 문제아 막내아들이 있다는 것!
우리 집에도 막내 외삼촌이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고
엄마는 그런 자기 동생을 ‘저놈의 손’ 혹은 ‘이놈의 손’이라 불렀다.
얼마전 영어회화 예문에서
"가족중에 꼭 이상한 삼촌 한명씩은 있지 않아?"
가 나온거 보니 이건 전세계가 가진 공통점이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외삼촌의 존재가 딱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이정재였다.
왠지 우리들 막내 외삼촌이 거기 가면 1등 할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바보 멍충 사고뭉치이지만 알고 보면 지독하게 다정한 사람이다.
어릴때 엄마가 라면, 피자, 치킨을 몸에 안좋다는 이유로 못먹게 했는데 외삼촌은 악역을 담당하고
치킨을 우리에게 시켜줬었다.
엄마한테 등짝을 맞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와 치킨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 제목처럼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살아남는 것 같다.
<오징어 게임>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을까?
할머니가 틀니를 끼고 송편을 드신다.
아까부터 틀니를 끼는 귀찮음에 먹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혼자 살지만 냉장고가 두 개다.
그 말인즉슨 식생활을 소중히 여기고 즐긴다는 뜻이다.
그런 할머니에게 아침잠을 뿌리치고 송편을 무사히 구해와서 뿌듯하다.
항상 뉴스만 틀어 놓으시는데 뉴스엔 집값과 코인 이야기뿐이다.
뉴스가 썩어서 구린내가 난다.
나의 외할머니는 드라마를 좋아해서 항상 날 붙들고 줄거리를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내 뿌리를 더듬고, 기억하고, 간직하는 일은 근사하다.
고통스러웠던 명절이 신기하게도 좋아져 간다.
할머니가 앞으로 이런 구린 뉴스 말고 너무 재밌어서 밤새는 걸 봤으면 좋겠다.
남편에게 당장 넷플릭스를 깔으라 요청하고 할머니에게 <오징어 게임>을 추천한다.
그걸 100세가 본 느낌은 어떤지 벌써부터 다음 만남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