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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Aug 16. 2023

눈으로 시계바늘을 밀어올리 듯.

오발탄. 전반부에 나오는 문장이다.


주인공이 회사 사무실에서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동료들을 묘사한 부분인데, 동료들은 계속해서 시계를 쳐다보다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6시가 가까워지자 시도때도 없이 시계를 쳐다보다 6시 정각이 되자마자 겉옷을 들고 부리나케 퇴근하는 직장인들. 마치 '눈으로 시곗바늘을 밀어올리듯'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시작이 '터널을 나오니 설국이었다'다. 정확히 얘기하면 '라고 한다'-나는 설국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도입부만 몇번을 읽다 말았으니 읽은 것처럼 말하기엔 민망하다. 전문가들이 흔히 이 오프닝이야말로 전세계 문학작품 중 으뜸으로 꼽히는 도입이라 말한다. 그런데 내가 문학작품을 왕성히 접한 학창시절을 지배한 건 한국의 근현대문학이었고 그 안에서 만난 표현들에 비하면 설국은 그저 낯선 타국의 거창한 문장 중 하나일 뿐이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읽기 시작한 현진건, 이상, 김수영, 염상섭, 김동인, 황순원, 김유정 작가는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좋은 핑곗거리였다. 나는 공부하다 지겨워지면 한국단편문학집을 꺼냈고 읽고 또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감자', '봄봄', '벙어리삼룡이', '삼대' 등 유명작품으로 시작했지만 책을 거듭할수록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옮아갔다. 특히 좋아했던 건 부모 없는 오누이의 이야기를 담은 황순원 작가의 '별'이었는데, 줄바꿈을 많이 하지 않아 문단이 빡빡함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수월하고 신속하게 넘어다.


한국근대문학은 우울하고 어둡고 궁핍하고 애처로웠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가난했고, 부자나 권력자에게 유린당했다. 그런데도 외면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에서 근대까지, 어쩌면 현대까지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이러했기 때문인지, 우울을 탐독하는 내 성향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누렇게 바랜 책장에서 '오발탄'을 읽다 나는 '눈으로 시계바늘을 밀어올리'이라는 대목에서 퇴근 시간 즈음의 사무실 직장인들의 행태를 고스란히 담은 표현에 감탄했었다. 직장인도 해본 적 없는 사춘기 학생이었지만 그 모습을, 직장인 심경을, 그걸 조용히 바라보는 주인공 처지를 어쩜 이렇게 적확하면서 기깔나게 표현했는지 혼자 혀를 내둘렀다. 그 후로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이만한 표현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이효석의 메밀꽃필무렵에서는 '소금을 뿌려놓은 듯' 이라는 표현에서 난생 한번 가보지 못했한 강원도 달밤에 메밀밭이 그려지는 듯 했고, 다른 시대에 태어난 기형도 시인의 시에서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에서 또 밑줄을 그을 수 밖에 없었다. 오규원 시인은 또 '지금까지 잘못 살았으면, 앞으로도 잘못 사는 것 또한 방법이라고' 하여 위안을 주었다. 나도 잠이 안오는 밤 새벽 두시가 되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들어 자괴감과 회한에 결국 절망에까지 빠지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어. 라는 혼잣말을 일기장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퇴근시간을 10분 남겨놓고 계속 시계를 흘끗거리며 오발탄이 생각났고, 내가 감동한 다른 문장들도 생각났다. 여자는 출산하면 한번 멍청해지고, 아이를 키우며 또 한번 멍청해지는 걸까. 머리를 쓰지 않다보니 이제는 기억하던 많은 것들이 희미해졌고 아예 '내가 그런 걸 알고 있었다고?' 싶은 생각마저 하게 되는데,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오발탄의 문장이 생각나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멍청해진 건 아닌 것 같아 잠시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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