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기자가 되고 싶다는 내 말에 사주풀이하는 아저씨는 "기자를 해도 큰 거는 못해. 그릇이 작아서, 정치나 사회 이런 건 할 그릇이 못돼요. 만약에 한다해도 연예나 가십거리 정도 다루는 기자?" 그 말이 기분이 나빠서인지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시험보는 큰 언론사와 방송사는 끝내 나를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엔 작은 매체에 정착해 오랫동안 일하며 기자로 살았다. 아. 물론 연예기자나 인터넷 게시판만 보고 배끼는 그런 기자는 아니었다.
'작은 그릇'을 타고나 기자가 된 내가 오랫동안 맡은 분야는 경제였다. 경제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한마디로 장사가 잘 되는 이유, 안 되는 원인을 찾는 거였다. 이게 나름 나에겐 잘 맞는 분야였다. 정치인과 기업인의 뒤를 캐는 것보다, 우리 생활에서 뭐가 달라지고 뭐가 유행인지, 그게 왜 유행이어서 대리점이 우후죽순 생기는 지 알아보는 게 적성에 맞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취재는 에이즈 진단키트에 대한 거였다. 몇년 전 부산에서 에이즈 환자가 자신이 환자임을 알면서도 무분별한 성생활을 하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부산 지역 약국들에선 갑자기 에이즈 진단키트 판매율이 폭증했다. 한 약사에게 물어보니 "약국에 들어와 에이즈 진단키트 있어요? 하고는 몇 개씩 사가는 사람이 꽤 있다"며 전에는 전혀 없었던 현상이란다. 그 약사는 "그런 사람들은 들어와서 눈도 안 마주쳐요. 딴 데 보면서 키트만 계산하고 얼른 나가요"라고 덧붙였다. 뉴스와 진단키트 판매율 급증 사이의 상관관계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경제 분야 기자를 그만 둔지 꽤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낯선 곳에 가면 상권을 살핀다. 여긴 학생이 많이 살겠네, 그런데 주간 유동인구는 많지 않으니 의외로 학생 대상으로 한 음식점은 잘 안 되겠어. 대신 야간 유동인구가 꽤 될테니 술집이 잘 되겠군. 그것도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저렴하고 푸짐한 곳. --이런 식인데, 이 분석이 얼마나 맞을 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다. 누구나 이 정도 분석은 하고나서 가게를 열지만, 그렇게 개업하는 자영업자의 가게들이 1년이 되기도 전에 절반이 문을 닫으니까. 내 개뿔 분석은 그저 내 안에만 간직해야지.
아침에 지하철역을 나와 사무실까지 걷는 길 중간에는 카페가 두 개 있다. 둘 다 바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브랜드가 없는 저가의, 고용량 커피를 판다. 두 곳 모두 커피를 먹어보고 한 곳의 단골이 되어 스탬프를 찍기 시작했다. 가격은 다른 한 곳보다 500원 가량 비싸지만 맛이 월등하고 매장도 깨끗했다. 혼자 일하는 젊은 여사장님의 인상이 좋아 제품에도 신뢰가 갔다. 그렇게 스탬프 8개까지 채운 어느 날 아침, 덥고 습한 공기에 시원한 아이스라떼를 떠올리며 단골집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매장 안에 사람이 많았다.
무슨 일이래?
하곤 키오스크에서 아이스라떼를 계산하곤 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비로소 주인이 바뀌었음이 보였다. 젊은 여사장님 대신 아저씨가 혼자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휴가가셨나..'하곤 커피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나를 포함한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렇다. 아저씨는 초보였던 거다. 여사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저 분께 매장을 맡기셨나...9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제 24번 주문 커피를 내놓고 있었다. 나는 30번이었다.
"사장님, 죄송한데 환불 될까요? 저 빨리 가야해서요."
참을성 없는 나는 다른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카운터로 나섰고, 아저씨는 주문을 확인하곤 방금 내린 에스프레소를 얼른 우유 컵에 담아주셨다. 저요? 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참 사람 좋은 얼굴이다. 감사 인사를 하고 라떼를 받아들고 나서는데, 매장에서 내가 기다린 시간은 10여분. 평소 손 빠른 여사장님이 계실 때 매장에 사람이 없었던 이유도, 오늘 아침 사람이 많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 아침부터는 꼭 '누가 계신지' 확인하고 주문해야지 다짐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 오늘 아침 빠르게 지나치며 단골집을 보니 여전히 아저씨가 계셨다. 순간 '매장을 양도하신 건가'라는 생각에 고작 8번 봤던 여사장님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매장이 텅 빈 채 손님이 하나도 없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침마다 여기 들러 커피 타가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아저씨 사장님은 유리문 밖을 바라보며 테이블만 닦고 있었다. 금요일 단 하루 동안 안 좋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단골손님들이 등을 돌린 걸까. 바로 나처럼.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나라도 라떼 한잔을 사서 갈까 하다가 말았다. 나는 어제부터 장염에 걸려있다.
많은 유동인구와 고정적인 단골손님을 보고 가게를 인수한(아직 인수한 게 맞는지도 확실치 않지만) 아저씨는, 괜찮으실까. 부디 요 며칠 여사장님이 휴가를 가신 거라고 믿고 싶다. 내 출근길 커피와 손이 느린 아저씨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