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bulddae Nov 20. 2023

수많고 많은 중에 단 한 곳. 여긴 처음부터 달랐다.

남편과는 싸웠지만, 일에서는 하늘이 도우신 날.

세상에는 당장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어쩌지 못 하는 게 몇가지 있다. 대표적인 게 시간을 들여야 만들어지는 것. 오래된 가구나 물건, 나무가 자라게 하는 것, 사람이 자라고 나이드는 것.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일들이다.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더라도 시간만 있으면 서서히, 그러나 꾸준하게, 일관되게 변화하는 것들 말이다. 돈을 써서 전문가에게 '그럴 듯 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이건 진실로 변한 게 아니니 반칙이고, 사기다.


오늘 맞딱뜨린, 오래전 물건을 구하는 것도 그랬다. 옛날 체온계가 필요했다. 당장 전시를 해야 하는데, 옛날 복식에 들어갈 옛날 체온계 말이다. 나 어릴적만 해도 병원에 가면 둥근 유리체온계를 썼었는데, 그게 언제부터인가 다 바뀌어 지금은 어딜 가도 눈금 그려진 아날로그 체온계를 쓰는 곳이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중국에서 만든 걸 파는 곳들이 종종 있는데, 이건 직구이니 당장 받을 수 없다.  그걸 구하러 아침 댓바람부터 종로에 나갔다. 오래된 의료기기 상점들을 찾아보면 하나쯤은 남아있지 않을까.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 대여섯 군데에서 퇴짜를 맞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리고 오래된 상점의, 상점만큼 오래되신 사장님들은 왜그리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지. 그저 단지 "이제 그런 건 없다"고 한 말씀만 해주시면 되는데 왜 십중팔구, 내가 만난 사장님 중 서너명은 나에게 호통을 치는지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써요? 그거 금지된 지가 언젠데 그걸 찾아? 그거 쓰면 암 걸려, 암. 좋은 거 많은데 왜 그런 걸 찾아?"


아니요...제가 쓰겠다는 게 아니라, 옛날 옷 전시하는데 소품으로 필요해서요.


읍소하는 마음으로 설명해도 사장님들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화를 내시는 건지...) "정 필요하면 중고시장을 찾아보던가!!!!" 일갈에 가까이 있는 황학동을 가야하나..하며 거리에 서서 당근까지 뒤졌으나, 눈금체온계는 없었다.


예전에는 가가호호는 아니어도, 문방구에 가면 1000원 이내로 주고 쉽게 살 수 있는 빨간줄 들어있는 온도계. 지금은 영영 자취를 감춘 이유는 그 안에 들어있는 수은 때문이었다. 수은이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해 수축과 팽창이 원활해 온도계에 적합했으나, 유리가 깨져 수은이 밖으로 나오면 위험했다. 나라에선 언제인가 수은온도계 생산을 금지했고, 이젠 우리나라에서 이걸 만드는 공장은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내가 들른 모든 상점에서 반복해 들으면서도 생각했다. '하나쯤은 남지 않았을까. 그 당시 상황에서, 문닫는 공장이 반품을 원활하게 받았을 리 없다. 그냥 보기에도 영세하게 운영하는 이 작은 상점들이 그 수은 체온계(온도계)를 모두 찾아 갯수를 헤아려 재깍재깍 반품하고 정산했을 것 같진 않다. 팔다 남은, 하나쯤은 이 종로 거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다만... 어디에 남아있는지가 관건이다.


퇴짜에 퇴짜를 맞다, 한 상점 앞에 멈춰섰다. 아까도 지나갔던 곳인데, 내부가 유난히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여긴 너무 깨끗해서 옛날 게 없겠지' 하곤 지나친 곳이다. 다른 가게들처럼 가게 외부 문과 유리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스티커나 손글씨 안내문, 제품 포스터도 없고 내부는 딱 맞게 짜여진 진열장에 의료기구가 정갈하게 진열된 게 밖에서도 보였다. 조명은 형광등이라 분위기가 파리했지만, 사장님과 직원 둘이 각 자리에 서서 용품을 정리하는 모습이 얼핏 보기에도 '정돈'이란 단어가 현실에 가시화된  느껴졌다. 할아버지 한 두분이 앉아 넋놓고 TV를 보고있는 대다수의 상점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밑져야 본전이니, 사무실 복귀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러보자 싶어 들어갔다. 내 질문도 "~~ 있어요?" 라는 긍정어가 아닌, "~~ 없지요?" 라는. 자신없는 말투의 부정어였다.


"사장님, 혹시 눈금 체온계 없지요. 옛날에 쓰던 거요."


 차림새가 단정하고 안경을 쓰신 사장님이, 잠시만요. 하며 매장 구석으로 가셨다. 음????/? 잠깐, 이건. 잠깐. 옛날 체온계가 있나??? 어?? 어?! --------물어본 내가 더 당황하고 있었다.


"알코올이나 이런 걸로 만든 이런 체온계요?"


하며 사장님은 낡고 낡은, 테두리가 다 구겨진 작은 종이상자를 꺼내보였다. 우와.... 이거 진짜 있네? 난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네네, 어머나. 세상에 . 있네 있어@. 이게 있네요 사장님!!" 저절로 육성으로 탄성이 나왔다.


사장님이 종이상자를 열어 보여주신 체온계는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 병원에 가면 입에 물고 겨드랑이에 끼던 노란색 유리 체온계. 그거였다. 너무 기뻐 사장님에게 연신 감사하다 말하고는 구하고 있는 다른 제품도 여쭤보았다. 사장님은 다른 진열장 서랍을 열어 사이즈 별로 꺼내 놓고 보여주셨다. 우와....... 내 앞에 계신 건, 그냥 사장님이 아니라 의료기기의 장인이로구나. 나는 딱 맞는 원하던 사이즈의 것을 골라 체온계와 함께 계산을 하고 지하철을 탔다. 사무실을 들어올 땐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어머, 세상에. 이걸 어디서 구했어. 이거 진짜 옛날꺼잖어. 세상에. 딱 맞네. 세상에."


옛날 체온계를 애타게 찾던 모두가 환호했다. 한글이 쓰여진 종이상자 안에 옛날 체온계.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생산된 아날로그 체온계일지 모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가게 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이런 체온계가 한두개는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님들은 자기 가게에 그게 남아있는 줄도 모르고 계셨을 거다. 그래서 그걸 사려는 사람에게 딱 전달하지 못했을 뿐이고. 옛날에 팔다 한 두개 남은 재고. 그거 하나 더 판다고 큰 소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자기 가게를 체계적인 재고 정리와 매장 관리 기준을 가지고 운영하는 사람만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참 큰 걸 배웠다. 같은 걸 판다고 다 같은 상점이 아니다. 많고 많은 동종업계 상점 중에도 여타 매장과는 다른 곳이 존재한다. 어디 상점 뿐이랴. 회사에서 보고서를 한 장 써도 원칙이 있는 직원과 없는 직원 간의 차이는 크다. 자영업이 되고 프리랜서가 되면 이 차이는 더 벌어지고, 더 눈에 띈다. 자기 기준을 갖고, 철저한 원칙 아래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않은 사람 사이에 말이다.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오늘 갔던 그 곳이 송곳처럼 비죽이 튀어나와 보여, 내가 그곳에 들어가 다행인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관계'가 달라졌다. 아주 많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