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bulddae Nov 29. 2023

술에 관대한 사회_숙취에 찌든 국회의원

나도 전에는 진짜 마실만큼 마셨지만.... 반성하며 쓰는 글.

행사에 갔다. 다니는 회사가 국회의원회관에서 학술세미나를 열었는데, 너무나 바쁜 상사를 대신해 나 혼자 취재를 갔다. 아침 8시반에 9호선 국회의사당 역에서 내리자니, 이렇게 많은 인원이 급행이 서지 않는 국회의사당역에 내리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이 정도 유동인구면 급행도 서는 역으로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생각하다, 그거 하나 바꾸기 위해 9호선 내 열차 시간표 변경, 역사 내 모든 팻말과 텍스트 변경(일반 → 급행) 등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만 머리가 지끈거려 생각을 멈췄다. 쏟아지는 인파에 휩쓸려 역을 나서니, 이제는 차가운 바람을 타고 확성기 소리와 진취적인 음악이 고래고래 들려왔다. 오늘도 원하는 법을 관철시키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시끄러운 수단들을 동원해 떠드는 곳, 국회에 도착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의미를 넘어서 과도하게, 비상식적으로 발달한 것 중 하나가 '의전'이라 한다. 이런 단체에서 일했거나 '회장님', '사장님'을 모셔본 사람들은 의전에 유난히 예민하다. 목숨을 거는 이도 많다. 또 그게 통해 내 승진이나 보직이 결정되기도 하니. 하지만 언제나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본 의전은 피식 웃음이 난다. 저렇게까지 쩔쩔 매야 하나...의전이 발전할 수록 사회 수준은 퇴보한다. 각자 하는 일이 다를 뿐인데, 왜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서열이 생기나. 얼마 전 갤러리에서 작품을 설치하는데, 별의별 전시를 다 다녀본 작품 캡션 업체 사람은 말했다. 어디 회사에서 한 기획전에 갔는데, 그 담당자가 글자 하나라도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기에 '뭐 그렇게 벌벌떠냐' 했더니 그러더랜다. '우리 회장님 성격 아시잖아요...이거 하나라도 잘못되면 저 짤려요.' 이 정도 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과도한 의전을 받으며 한 사람이 행사장에 들어왔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다선 국회의원이다. 의원과 함께 의원실 직원들도 들어와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로 찍는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까지 모두 일어나 의원을 맞는다. 손을 잡고 악수할 땐 허리가 땅바닥까지 수그려진다. 의원'님'은 잠시 앉았다가, 식순을 무시하고 모든 순서에 앞서 제일 먼저 인사말을 하러 단상에 올랐다. 다른 일정이 빠듯해 얼른 얼굴을 비추고 자리를 떠야해서다. 이런 결례?까지도 다 용인됨은 물론이요, 그 바쁜 와중에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더욱 더 감사할 지경이다. 관계자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인사말을 기다린다.


평소엔 유려하게 말 잘 하는 정치인인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버벅댄다. 다선 의원 중에서도 위원장을 맡을 정도이니, 말 하나는 얼마나 잘 하겠느냐마는 오늘의 다선의원은 뭔가 이상하다. 눈빛이 자주 흔들리고 말도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럴거면 그냥 써온 원고를 읽지, 할 즈음 의원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제 과음을 좀 했더니, 마 말이 좀 매끄럽지 않은 부분, 양해해주십시오. 하하하"


일순간 분위기가 누그러지며 다들 빵-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아이고 우리 의원님 과음하셨구나. 얼마나 마시셨어 그래. 화기애애한 웃음이 이런 말들로 숙취에 찌든 의원을 다독이는 듯 했다. 다들 갑자기 한 가족이 된 듯한 웃음이다. 의원도 그렇게 한 번 웃더니 어눌한 인사말을 건네고 금세 자리를 떴다. 행사 관계자들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면서 말이다.


                                                                                        ---


술을 마시고 저지른 범죄에 우리는 그간 얼마나 분노했던가. 음주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감형 사유가 된다. 그러면 술은 뭐, 누가 억지로 가해자 입에 쳐넣었나. 본인이 원해서 마시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취하고, 본인의 의지로 범죄를 저질렀으면 응당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데, 본인 의지로 마신 술이 그 책임의 일부를 덜어간다.


이날도 그렇다. 중요한 자리고, 표를 의식하는 국회의원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취해 단상에 오른 행동이, 과연 응원하고 격려받을 일인가. 행사 주최자라면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술이 덜 깨 들어와?'하고 화가 날 법도 한데, 숙취를 고백한 순간 모두가 '와 우리 의원님이 이런 소탈한 면도 있으셔' '어쩜 이렇게 인간적이야?'하며 애정어린 반응을 보낸다.


술에 관대한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자리, 만약 그저 한 직능단체의 작은 세미나가 아니라 국제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였다면 어땠을까. 범위를 늘려, 국민 100명, 500명, 1000명이 모인 자리였다면 어땠을까. 전날 술약속이 있든 술자리에 몇시까지 앉아있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인물이, 전날 일정이 어쨋든 약속한 시간엔 멀쩡한 얼굴로 자기 할 역할을 온전히 해야 한다. 과음을 했다며 퉁칠 일이 아니다. 술 먹어 그렇다는 설명이, 이렇게 푸근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과연 상식선의 일인가.  남편을 통해 듣는 경찰 접수 사건의 80% 이상이 술로 인해 일어난다. 다툼과 폭행, 대부분이 술과 연관돼있다. 평상시에 말다툼으로 끝날 갈등이, 술자리에선 칼부림으로 확대한다. 술을 마시고 오는 충동으로 시비를 걸고, 사람을 때리고, 성폭행하고, 1인가구에 침입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인생을 망친다. 이 정도 되면 술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관대함을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어떤 이는 요즘 학생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에 대해 '술보다 싸서'라고도 하던데, 이쯤 되면 이 사회에서 술이 가지는 보편성, 술이 주는 폐해를 우리가 다시 진단해야 할 때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많고 많은 중에 단 한 곳. 여긴 처음부터 달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