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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Nov 30. 2023

김치, 김장. 애증의 김장철

점심으로 야채랑 고구마를 잔뜩 먹었는데 왜인지 속이 허하다. 이제 2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2시간 만에 속이 허하다니. 야채 한 그릇만으로는 속이 달래지지 않을만큼 양이 늘은 건지, 신체 홀몬 주기에 따라 먹성이 요동치는 시기가 된 건지, 어쨋든 급한 일을 해치운 터라 핸드폰만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날씨가 너무 춥고 바람도 거센, 진짜 겨울이다.


나는 밖에 나와 혼자 점심을 먹을 때면 으레 국숫집을 간다. 원체 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뜨근한 국물에 호로록 면발을 함께 먹으며 김치를 와작와작 씹어 스트레스까지 다스릴 수 있는 국수는 나에게 만병통치 식이다. 그래서 뭘 먹을라치면 눈에 띄는 모든 집은 국수집이다. 요즘은 추운 바람에 유독 칼국수가 당긴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검색을 하니, 마침 걸어서 5분 거리에 '충무로 3대 칼국수 집'이라고 불리우는 집이 있다기에 망설이지 않고 목적지를 정했다. 마침 사람 붐빌 시간도 아니니, 테이블 몇개 없는 집이라지만 바로 먹을 수 있겠지 하고 길을 찾아가니, 꼬불꼬불 이렇게 후미진 곳에 음식점이 있나 의심이 가기 시작할 때 간판이 보였다. 오래된 건물에 더 오래되어 보이는 점포. 아무리 노포를 좋아하는 나지만, 문을 열기 전 잠깐 움찔할 정도로 오래되고, 낙후되고, 어두웠다.


칼국수를 시키고 앉으려니 바로 앞에서 남자 사장님이 배추를 펼쳐놓기 시작하신다. 그러고는 겉잎을 자르고 한 포기를 4등분 내 테이블에 척척 올려두신다. 바로바로 버무린 겉절이가 유명한 집이라더니, 과연 매일 이렇게 배추를 다듬어 김치를 버무리시는구나 할 즈음 칼국수가 나왔다. 빨간 배추겉절이와 함께.



국물부터 한 입 마시니, 아....담백하고 짜지않다. 멸치맛도 나면서 뭔가 부드러운 풍미가 있다. 재료를 분석하는 건 특기가 아니다. 빨간 겉절이를 면에 싸서 한 입 가득 넣으니, 배가 부르기도 전에 입이 부르고 마음이 부르다. 아.... 좋다.... 후루룩 후루룩 후루루루룩 마시듯 면발을 삼키는 동안 앞 테이블에는 사장님이 다듬은 배추 포기도 쌓여간다.  



그러고 보니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11월은 내 생일이 있어 좋으면서도 김장을 하는 달이라 싫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와 함께 김장을 했는데, 딸이 셋이면서도 내 기억 속 김장하는날엔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어릴 때 살던 오래된 한옥은 겨울이 얼마나 추웠던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이모에게 '1년 중 제일 싫은 때가 김장철'이라고 말했다가 '너는 어린 애가 벌써 그런 말을 하냐'며 이모가 깔깔깔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의 김장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김장을 더 힘들게 해야 했다. 밖과 안을 구분하는 건 얇은 덧문 하나밖에 없는 전쟁 후 막 지은 한옥이었는데, 전날 마당에서 배추를 다듬어 수돗가에 있는 빨간 다라이에 채운 소금물에 배추를 절여두는 게 김장의 시작이었다.


김장날은 수돗가 찬물로 그 배추를 서너번 씻어 엎어서 물을 빼는 사이 밖에 그다지 차이나지 않게 추운 부엌에서 무를 채썰어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다. 모든 유리가 그렇듯 재료준비가 절반. 모든 야채를 씻고 자르고 하는 사이 손이 얼고 발가락이 시렸다. 그러고 나서 모두 버무려 둘러앉아 배추를 싸다보면 이제는 허리와 등이 얼마나 아픈지, 그 어릴 적 엄마랑 배추 100포기 김장을 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의아하게 한다. 그렇게 매년, 매 늦가을마다 김장을 했다. 어느 작가가 글에서 '새색시가 김장 30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아마도 박완서 작가님 아닐까 추측- 그 표현처럼 김장철은 빨리 돌아왔고 나이를 먹을수록 1년은 금방금방 지나갔다.


이제는 내가 김장을 하지 않고 시댁과 친정에서 무차별로 보내오는 김치가 감당이 안될 정도로 잘 받아먹고 있지만, 가끔 생각한다. 우리 어머님 세대가 다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세대는 김치를 어디에서 받아먹을까. 받아먹을 시골집이 없으니 그때는 정말 마트에서 사먹는 수밖에. 그럼 그렇게 김치통이 3개, 4개씩 오지 않아도 되니 김치 쉰다고 걱정할 일 없고 묵은 김치 지져먹느라 온 집안에 젓갈냄새 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러나 진짜 그렇게 되면 집집마다 다르던 김치맛은 모두 없어지고, 씨제이 풀무원 종갓집 김치맛만 남겠지. 집집마다 갖고 있던 고유한 장맛이 다 사라지고, 모두 공장에서 만든 된장맛만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장님이 쌓아둔 배추가 채 김치로 버무려지기 전 나는 칼국수를 다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입에는 매콤한 고춧가루와 알큰한 마늘냄새가 가득하다. 겉절이가 얼마나 맛있던지 리필해서 두 접시나 먹은 탓이다. 가뜩이나 배춧값도 비싸다던데 김치를 너무 많이 먹었나 싶었다. 얼른 양치를 하고 마스크를 쓰고도 김치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 춥다...김장철이 지나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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