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몽골
군대에서 전역을 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취업준비생이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타이틀이 오랫동안 유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의 문턱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나를 넘겨주지 않았다. 항상 조금씩 모자라는 점수는 번번이 턱에 막혔다.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처럼 직장에서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들어만 가게 해준다면 무언들 못하랴, 뽑아만 주면 목숨 바쳐 일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해도 그렇게 문턱 가까이에 갔지만 그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좌절도 컸고 그 만큼 상처도 가슴에 크게 그어졌다. 한 달간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오로지 집에서 내가 극복하지 못했던 그 몇 점의 점수를 곱씹으며 잠이 들었다. 잠이 깨면 나를 좌절시킨 그 몇 점의 점수를 다시 머릿속에 되내이며 하루 종일 시간과 싸웠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십대인데 지금 집구석에 앉아 무얼 하고 있나 라는 회의가 들었다. 다시금 힘을 내어 시험은 잊어버린 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봤다. 학원에 등록하여 새벽부터 영어도 배워보고, 마음속에만 있던 계획인 혼자 자전거 여행도 떠나보고, 2주일 동안 도서관에 출퇴근하며 보고 싶었던 책들을 모두 보았다. 그리고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모두 만나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동철아, 외국 한 번 가볼래?”
식사 중에 뜬금없이 친한 형이 나에게 물었다.
평상시 나였으면 외국은 무슨 외국이냐고, 여기서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했을텐데,
“형, 외국 어디요? 제가 가서 할 일이 있어요?”
어느 나라 인지도 모른 상태였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이 앞섰다.
“몽골인데….어쩔래? 한 번 가 볼래?”
“몽골이요?”
몽골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칭기스칸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백지상태였기에 두려움이 많은 것이 정상이겠지만, 이상하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들의 앞날과 미래가 염려되어 가지 못하게 할 부모님이 안 계시기에 내가 여기서 간다고 말하면 진짜 몽골로 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사실 내 성격은 약간은 소심하다. 무언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도전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내가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몽골에 간다고 한다는 건 나를 아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일이다.
“형님, 그럼 저 한 번 가볼래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날이 제 2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정확히 두 달 후에 나는 몽골 칭기스칸 국제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무모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외국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에 여권을 만들고, 서울 올라가서 몽골 비자를 만들고, 짐을 싸서 배편으로 부치고, 추운 곳이라고 하기에 두터운 옷가지들을 준비하고, 가족과 친한 친구들과 만나 몽골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고 함께 밥을 먹으니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저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나라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2월의 몽골은 정말 추웠다. 철원에서 군생활을 했기에 추위라면 이골이 나 있었지만 이곳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말 말고는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정말 춥다는 표현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인터넷으로 몽골의 겨울이 춥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툼한 점퍼와 안에 입는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 옷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제게 영원히 따스함을 안겨주리라고 생각했던 목 폴라가 몽골 생활을 힘들게 할지는 그때는 몰랐다.
몽골의 겨울은 영하 30도 내지 40도까지 내려간다. 그러기에 밖에 나갈 때는 꽁꽁 둘러싸고 외출을 해야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몽골의 밖은 매우 춥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 따뜻하다는 사실이었다.
몽골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아파트의 문이 이중문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런 두께의 문이 아니다. 밀기도 무거운 30센티미터 두께의 나무문이 이중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중창은 차가운 외풍을 막기 위해 두꺼운 테이프로 열지 못하도록 여러겹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솜을 가득 넣어 차가운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여기에 하나 더, 방마다 우리나라의 라디에이터와 같은 온열기가 있어 아주 따뜻했다.
두꺼운 목 폴라 위주로 옷을 준비했던 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집에 놀러갈 때면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동철아, 어디 몸이 안 좋아?”
동료들이 내게 걱정스런운 말투로 얘기했지만 사실 아픈 것이 아니라 더워서 땀을 흘렸다.
그렇게 나는 동료들의 집에 갈 때면 항상 아픈 사람이 되어 있었다.
1주일을 그렇게 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옷을 사기로 했다. 몽골의 치안이 그렇게 좋지 않으니 되도록 퇴근 후에 어두워지면 집을 나가지 않는게 좋다는 동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꼭 옷을 사야했기에 나보다 1년 먼저 온 룸메이트와 함께 근처 시장으로 나갔다.
아직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버스비 100투그릭, 우리나라 70년대 버스를 타면 버스비를 걷는 아가씨처럼 몽골 버스에는 버스비를 걷는 아줌마가 있었다. 또 우리나라 노선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나라 회사의 버스. 그렇게 나는 시장에 가기 위해 강남역에서 정차하는 버스를 탔다.
낯선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시장에 도착했다.
“동철아, 여긴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조심해야 돼. 그리고 꼭 내 옆에 잘 붙어다니고.”
룸메이트는 주의사항 몇 가지를 얘기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목 폴라를 대신할 옷을 사기 위해 시장 안에 들어갔다. 시장은 북적북적 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것들도 많기에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룸메이트 형을 놓치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길을 가던 남자와 어깨가 부딪혀 시비가 붙었다.
“xxxxxxxxxxxxxx”
몽골 말로 빠르게 나에게 뭐라고 했지만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멱살을 잡히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이것 좀 놔주세요”
다급하게 한국말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 남자는 멱살을 놔 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한국말을 하니 더더욱 멱살을 꽉 잡았다. 점점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그때 룸메이트가 나를 찾게 되었고, 때마침 시장안에 있던 경찰들도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사건은 잘 마무리 되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씻고 자려고 누우니 한국이 그리웠다. 억울한 일을 당하니 더더욱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멱살을 잡혔다고, 너무 억울하고 화가난다고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많이 힘들었겠다고, 억울했겠다고, 몽골까지 와서 고생한다고 따스하게 말해줬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