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낙하

적색낙하탄

by 상현달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내 몸에 손을 댈라치면 금이야, 옥이야 조심조심 만진다. 사람들은 내가 항상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만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내게 소리를 치면 내가 힘차게 터진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다.


화는 다스리면 된다고 하고 삼켜서 녹여내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봤는데 영 쓸모없는 이야기이다. 백 번, 천 번 마음을 다스려 봤지만 분노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만 복잡해지고 분노만 끓어오른다. 이런 내 모습을 잘 알고 있기에 겉으로는 부드러운 척, 아무 걱정 없는 척, 상대방을 위하는 척, 기쁘게 웃는 척을 한다. 그래야 친구들이 나를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옆에는 두 명의 친한 친구들이 있다. 웃는 내 모습이 뒤에 있는 속마음을 알기에 ‘힘들었지?’, ‘고생했어!’ 이런 말들을 쉽게 하지 않는다. 내가 힘들 때면 그저 내 어깨에 손을 살며시 올리는 것으로 마음을 전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시덥잖은 위로와 격려로 나를 달래주려고 하지만 그런 소리르 들을 때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알지도 못하면서 던지는 가벼운 말들은 그들과 나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삶은 어떨 땐 그저 그렇게 두는 것이 좋다. 말없이, 그저 바라봐 주는 것,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들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들이 그렇다.


“벌써 12월 24일이네.”

“그니까, 올해도 이곳에서 이렇게 춥고 쓸쓸하게 보내네.”


내 앞을 지나가는 얼룩무늬 사람들의 투덜거림이 오늘은 꽤 많이 들려온다. 투덜거림, 한탄, 짜증들이 섞인 단어들은 평소에도 많이 듣곤 하지만 12월이 되면 더욱 늘어난다. 얼룩무늬들이 내뱉는 투덜거림과 짜증은 12월 24일이 되면 1년 동안 했던 말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진다. 좋은 말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자기 마음을 갉아먹는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상처가 사람을 아프게 할 수는 있어도 죽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말 한 마디는 사람에 마음에 꽂혀 그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총알이나 수류탄보다도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데 얼룩무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12월 24일은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설레는 날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익히 이해하고 있다. 남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화려한 거리를 걷고 따스한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반면에 얼룩무늬들은 칙칙한 또 한 명의 얼룩무늬와 함께 다이오드가 반짝이는 철책을 걸으며 뜨거운 컵라면을 호호 불어가며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니 좋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수가 없겠지.


얼마전에 까만 하늘을 수놓은 하얀 폭죽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뭉게뭉게 피어나기도 하고 하늘 높이 솟아올라 꽃봉우리를 피어내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구불구불 화살표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도 하고 그물에 잡힌 멸치 떼의 은색 비닐이 찬란하게 비추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떨까? 나는 어떤 아이일까? 나도 이들처럼 멋지고 예쁘고 아름답게 내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하지만 한 번도 나는 내가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이런 것들을 말해주지 않았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은 어떻다느니, 너희들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느니와 같은 두리뭉실한 말들 뿐이었다. 주위에서, TV에서, 인터넷에서 마구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가족이 있다.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내 부모님은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이름이 있다. 얼룩무늬들이 가지고 있는 주민번호처럼 나도 번호가 있다. 모든 생명체가 지구상에 홀연 듯 나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또 누군가의 손주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형이고 오빠이고 누나이며 언니이고 동생이다. 한 번도 그들을 보거나 만나보지 못했지만 분명 내게도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옆에 있었다면 허공에 울려 날아가는 그런 빈 말이 아닌 마음에 겹겹이 쌓일 수 있는 따스한 말들을 내게 해 줄 것이다. 그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안아 주는 것만으로 내가 살아갈 힘이 충전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의지할 한 명이 있다면, 내게 사랑의 마음을 전해주는 한 명이 있다면 세상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어둔 하늘처럼 쓸쓸하지는 않겠지. 그것도 12월 24일에 바라보는 높고 어두운 하늘은 아니겠지.


12월 24일, 11시 58분.


크리스마스가 되기 2분 전,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군가 나를 응원해주지 않는다고 나를 어둔 창고로 계속 밀어낼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없고, 진심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 스스로 비상하면 된다. 그 후에 어떻게 될지는 나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아름답게 어둔 밤 하늘을 밝힐 수도 있고 작은 불빛 하나 반짝하며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일단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는 것이 의미 있는 과정이지 않을까?


욕을 먹고 차가운 손가락질이 쏟아져서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선택한 길이고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하나의 생채기일 뿐이다. 일단 지금의 나를 벗어나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것을 보거나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는 솟았고 날았으며 밤하늘을 환하게 비췄다.


그게 나고 내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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