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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김 Apr 12. 2024

내 이름 문에 맑을 정을 씁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汶晶(내 이름 문, 맑을 정)

나의 이름은 문정입니다. 우리말 뜻으로는 내 이름 문 자에 맑을 정 자를 씁니다. 

아마 이름 짓는 작명소에서 지었을 것입니다. 사주를 보아하니 물이 부족하니 '글월 문'자에 '물 수 변'을 넣어야 좋다 하여 내 이름 문자를 넣은 것이지요. (어쩐지 피부가 건조하더라...)

그런데 내 이름 문 자는 '문란하다' 할 때 쓰는 문 자와 같은 한자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 문자의 또 다른 뜻은 '더럽힐 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 초등학교 졸업기념 선물로 학교에서 받은 옥편을 보면서 제일 먼저 제 이름의 한자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옥편에는 내 이름 문자라는 뜻은 보이지 않고 맨 앞에 '더럽힐 문'이라는 뜻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대로 '문정'이라는 이름을 직역하면 '맑은 물을 더럽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즈음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몸이 약한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면서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땐 할머니에게 맡겨 키워졌다고 들었습니다. 

자주 듣던 아기 때 일화로는 할머님 댁에서 마루에 자고 있는 아이를 두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데굴데굴 굴러서 마루 밑으로 떨어졌고, 그대로 또 데굴데굴 굴러서 마루 밑 구석에 가서 자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순하고 울지도 않고 컸다는 이야기를 칭찬 삼아해 주시곤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님이 저를  키워주셨다는 것은 제가 할머님에 대한 많은 애정을 갖도록 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6.25 전쟁 중에 그랬는지 폭탄 떨어지는 큰 소리에 귀가 멀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식들과도 언어적 소통이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는 술을 좋아하셨어요. 밥도 해 드시지 않고 술로만 끼니를 때우는 적도 많았거든요. 나중엔 치매가 와서 가족들도 못 알아보시곤 했는데 그런 할머니가 제 이름을 기억하시고 " 내가 너를 업어 키웠다~" 하면서 한말 또 하고, 또 하고, 하셨지요. 저는 그런 모습도 안쓰럽고 귀여우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잘것없는 나를 유일하게 기억해 주는 것도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청각장애인인 할머니께서 제가 우는지 어쩌는지 어찌 알았을까요? 데굴데굴 굴러 마루밑에 떨어지다 못해 구석 안으로까지 들어가 있을 동안 어찌 아기가 깨서 울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요?  

또 이모들은 저에게 만날 때마다  ' 너만 안 낳았어도 너희 엄마가 아프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거기다 동네 어른들은 우스갯소리로 '너 너네 엄마가 저~~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잉~ '라고 말씀하시고는 저의 놀라는 표정을 보면서 재미있어하셨지요.  

그런데 불행히도 저희 어머니는 제가 중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사이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제가 도착한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원래도 약하셨던 몸을 세차장을 운영하시면서 무리하셨는지 그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몸이 약하신 엄마는 원래 집에서 살림만 하셨습니다. 풍족하지 않았던 우리 집 경제사정을 알고 있던 저는 

어느 날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있는 자리에서

 '우리 엄마는 이제 돈 벌어야 돼요.'

라는 말을 아주 되바라지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말을 듣던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고 나중에 혼자 후회했었습니다.

그 말에 엄마가 그렇게도 열심히 세차장 일을 하신 게 아닐까 하고..  

 

저는 문정이라는 이름의 직역된 뜻을 생각하며 이런 말들과 사건들을 하나하나 곱씹게 되었던 거 같아요.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힘들게 한 아이였구나.

-나는 정말로 엄마의 친자식이 아닐지도 몰라.

-사실 난 엄마를 하나도 닮지 않았어. 

-엄마는 나를 아껴주지 않았지.

-옷도 늘 오빠 거 물려 입고 도시락반찬도 오빠만 맛있는 거 싸줬어.

-나에게 관심도 없었던 거 같아. 

-내가 행동이 느리다고 답답해하셨지. 

-엄마는 내가 신나서 놀던 수학여행 때 돌아가셨어.

-내가 신나게 놀 때 엄마는 사경을 헤매고 계셨을 텐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있었어.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엄마 곁을 떠나서 그렇게 된 걸지도 몰라. 

-나는 나쁜 아이야. 

-나는 재수 없는 아이야. 

-나는 정말 필요 없는 아이야. 

-나는 정말 누군가를 불행하게 하는 더럽히는 아이야.  

이런 생각들이 사춘기 시절의 저를 힘들게 했었습니다.  옥편에 조금맣게 쓰여있던 내 이름 문이라는 뜻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건 이미 나에게는 의미 없는 뜻이었으니까요.  


이제 내 나이 마흔넷. 엄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고 엄마가 돌아가셨던 그 나이에 제가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찌 될까요? 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갑자기 죽게 될까 두렵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건 나의 어린아이들이  어린 나처럼 죄책감과 미안함, 쓸모없음을 느끼고 엄마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갈까 봐 걱정이 돼서입니다.  

30년이 지나도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엄마는 나를 정말 사랑했을까? ' 

대답은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잘 먹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자주 해주셨 던 것. 

갓길을 걸을 때마다 차에 치이지 않게 하기 위해 나를 안쪽으로 보내고 손을 꼭 잡고 걸었던 것,

외갓집에 갈 때마다 나만 데리고  갔던 것.

어려운 형편에 나만 유치원에 보내주었었던 것 등등.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표현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게 사랑이었습니다. 

엄마의 음식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그래도 저는 30년 동안 물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정말 사랑했을까? '


지금 내 아이들은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요? 

-공부 좀 해라

-게임 좀 그만해라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밥 먹어라~~!!

-꼴도 보기 싫다 

온통 소리 지르는 말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나의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보잘것없는 나를 온전히 믿어주고 의지해주는,

보자마자 반가워서 달려와 안아주던

너희들이 있어서 나의 바닥이었던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꼭 말할 것입니다.

평생을 갸웃하며 살지 않도록.  


그리고 나는 다시 말합니다.

 맑은 것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을 맑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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