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이와 부드러운 혀가 주는 교훈에 답이 있다.
태강즉절(太剛則折) 고사를 반추해 본다.
나무도, 사람도, 힘·권력도 마냥 강하면 부러지기 쉽다는 뜻이다.
유연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태강즉절이 그 답이다.
나무는 강풍에 쓰러져도 억새풀이나 갈대 같은 연약한 풀은 절대 쓰러지는 법이 없는 것은 이 유연성의 대표적 예다.
감도 단단한 땡감이 바람 불면 감나무에서 떨어지지, 홍시는 끝까지 매달려 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무조건 강해질 것을 요구한다.
약육강식만 부추기는 게 오늘날 우리네 실정이다.
우리는 대체로 강한 것이 부드러운 것을 이길 것으로 여긴다.
단기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시간을 두고 보면 반드시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단단한 것이 아닌 부드러움이다.
상용(商容)은 노자(老子)의 스승이다.
임종을 앞둔 늙은 스승 상용(商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인 노자(老子)를 불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다음은 사제간의 대화 내용이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다.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것을 명심하라.'
'휘어지는 부드러움’이 ‘날카로운 단단함’을 이긴다. “
진정한 교훈이다.
노자의 또 다른 일화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아침, 숲을 거닐고 있던 노자(老子)는 주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어떤 연유인가 하여 올려다보았더니 굵고 튼튼한 가지들은 처음에는 점차 무거워지는 눈의 무게를 구부러짐 없이 지탱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반면 이보다 가늘고 작은 가지들은 눈이 쌓임에 따라 자연스레 휘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린 후에 다시 원래대로 튀어 올라 본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형태를 구부러뜨림으로써 변화하는 것이 버티고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이치로구나!”
이것이 바로 노자가 얻은 깨우침이었다.
골프 경기를 할 때에도 많은 아마추어가 실제 스윙을 연습 스윙만큼 못 한다.
공을 가격하는 지점에서 공을 세게 맞춰야겠다는 욕심이 순간적으로 들면서 골프 스윙이 정상적이지 못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을 정면으로 정확하게 가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가격하게 된다.
티(tee) 위에 공이 없다고 최면을 걸고 힘을 빼고 연습했던 대로 부드럽게 스윙을 했을 때 오히려 원하는 방향으로 골프공의 정면을 가격할 수 있다.
이 역시, 강함과 부드러움의 또 다른 예다.
도덕경이 주는 교훈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강한 것이며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守柔曰强 柔之勝剛 弱之勝强)“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펜은 칼보다 강하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 는 서양 격언도 이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지 않나 싶다.
단단한, 강인함, 용맹함만 수박 겉 핣기 처럼 난무하는 한국 정치권에 용맹함만 있다면 무슨 소용 있느냐고 질문해 본다.
부드럽게 국민을 생각하는, 국민을 위하는,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의 권리와 복지를 대변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를 간절히 바라는 계산된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