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는 서울식, 갈면 경상도식, 무엇이 문제일 쏘냐!
어언 낙엽도 속세를 떠나 땅 밑으로 묻히고 마는 쓸쓸한 늦가을이다.
따뜻한 차 한잔을 두 손으로 꼬옥 움켜쥔 채, 호호 불어 가며 짙어가는 늦가을의 정취를 달래 보는 여유를 갖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인근 공원이나 산을 찾아지는 단풍을 보면서 속절없이 빨리 가는 인생을 나무라거나 혹은 꾸짖어 보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는다.
늦가을의 운치하면 음식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삼복에 삼계탕이라면 가을 보양식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추어탕이 으뜸이다.
미끄덩미끄덩 한 감촉과 다소 잠수함 같은 기이한(?) 외형에서 오는 비호감 때문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음식은 못 되지만, “보양식 측면에서는 이를 당 해낼 음식이 없다”라는 음식 전문가가 엄청 난 까닭에 가을을 대신해 추어탕을 소환해 본다.
흔히 추어탕 하면 앞 글자 ‘추’를 가을 추 자로 생각하기 쉽다.
한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자. 추어(鰍魚)할 때의 미꾸라지 추(鰍=鰌) 자를 보면, 가을 추(秋) 자 앞에 고기 어(魚)가 들어앉아 있다.
‘가을을 대표하는 물고기’라는 의미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한국의 추어탕은 조리법에 따라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통째로 삶아서 만드는 서울식이 한 가지요, 무쇠솥에 푹 삶은 흐물흐물한 미꾸라지를 체에 밭치거나 베 보자기로 순수한 고깃국물을 내려 끓이는 경상도 식이 그다음이다.
이 추어탕에는 두부를 빼놓을 수 없다.
미꾸라지를 가마솥에 물과 두부 몇 모와 함께 넣고 서서히 불을 지피기 시작하면 미꾸라지들이 뜨거운 것을 피해 두 부 안으로 자연스레 스멀스멀 진입한다. 피난처로 두부 속을 택하는 것이다. 이때 어울리는 두부와 추어의 콤비네이션 맛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가히 환상적이다.
추어탕은 주로 서울의 성균관 부근에 살던 도살이나 푸줏간 일을 하던 하층 계급의 사람들의 별식이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근처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한 움큼 건져다가 부두 된장 넣고 끓여 먹은 대서 유래하는 것이다. ‘추 두부탕’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충남 금산 지역에 이 습속이 약간 남아있을 뿐, 추 두부탕을 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도구 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가?
농촌에서는 추분이 지나고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면 논에서 물을 빼주고 논 둘레에 도랑을 판다. 이를 ‘도구 친다’고 한다.
도구 치면 진흙 속에서 겨울잠을 자려고 논바닥으로 파고들어 간 살찐 미꾸라지들이 즐비하다.
이것으로 국을 끓여서 동네잔치를 연다.
이를 ‘갚은 턱’ 또는 ‘상치(尙齒 노인을 숭상하는 것) 마당’이라고 한다. 마을 어른들께 감사의 표시로 미꾸라지 국을 대접하는 것이다. ‘한 턱 베푸는 것을 어른께 갚는다’는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은데 퍽이나 다정스러운 명칭이다.
효심이 깃든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늘 같이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계절이 평행 이동하는 날엔 추어탕 한 그릇은 큰 위안이 될 것 같다.
서울식이면 어떠하리? 경상도식이면 어떠하리? 또 남원식, 원주식이면 더다구나 어떠하리?
맵디 매운 청양고추 잘게 다져 다대기와 함께 넣어 휘휘 저은 후, 후춧가루나 산초 가루 듬뿍 뿌린 채호호 불면서 먹는 한 그릇 추어탕에 땀 살짝 내면서 그 맛에 푹 빠져보자고 권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