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퇴사, 안 좋은 퇴사는 분명 있다.
퇴사를 결심하고 나는 퇴사사유에 대해 생각했다. 당연히 퇴사 이유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다음에 결정을 내린 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공식적인 퇴사사유를 생각해야 했다.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더 좋은 조건의 기회가 왔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둔 이유도 비슷했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경력을 확대할 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했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었다. (좋은 퇴사)
하지만 이번 퇴사는 이유를 미리 생각해야 했다.
나는 괜찮은 연봉을 받고 있었고 업무환경도 훌륭했다. 회사도 꾸준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그만 둘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고통스러웠다. 과거에는 적당한 때에 좋은 기회가 생겨 자연스럽게 퇴사를 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내가 하고 싶고 가고 싶은 회사를 찾기 어려웠다. 다음 회사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사표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이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지금 이 정도로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를 정돈되고 프로페셔널하게 설명해 줄 이유는 뭐가 있을까.
나는 퇴사자 면담에서 나의 커리어 한계와 개인적 사유라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두리뭉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은 이랬다.
긴밀하게 일해야 하는 친한 동료의 가족과 형사사건이 있었다. 믿고 친했던 그 동료의 상식 밖의 행동 때문에 사건은 조사도 못한 채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솔직하게 이야기할 기회와 사과할 기회를 여러 차례 주었음에도 핑계와 개소리만 늘어놓을 뿐 끝내 진심 담긴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기네들은 충분히 고통받고 있으니 그것으로 벌을 다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미안해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나니 정신승리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잘 다녔다. 그 사람은 내가 불편할 정도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혐오하고 증오했다. 사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사장님은 대충 둘이 적당히 화해? 하고 업무에 지장이 안 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친한 분도 처음에는 많이 놀라고 위로하더니 시간이 지나니, 내가 그 팀에 불만이나 이의를 제기할 때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륜이라고 생각하거나 무슨 일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아졌는데 내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나는 점점 재택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마흔의 나이에 새로운 판에 뛰어들었다. 안정적이던 외국계 대기업 R&D 부서에서 스타트업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특정 업계를 리딩하는 IT 기업으로 이직했다. 업무 자체도 바뀌었지만 업무 방식을 비롯해서 회사 문화가 정말 달랐다. 이전 회사도 내가 좋아했기에 오래 다녔었었지만 미국 IT 기업답게 빠르고 Lean 한 조직문화가 참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빠른 의사결정(너무 잦은 변화)과 간소한 절차(절차 없음)는 때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시작은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나는 상사와 면담을 하고 미팅룸을 나오면서 퇴사를 결심했다. 쇼윈도 앞에 진열되어 있다가 유행이 지나니 매장 구석 진열장으로 옮겨진 구두가 된 느낌을 받게 했다. 추후 내가 퇴사한다고 하니 상사는 그동안 자기가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감을 심어준 것 같다고 했다. 틀렸다. 회사의 결정에 불만이 있던 것이 아니라 과정과 전달방식의 문제였다.
그동안의 나의 기여에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놓이는 장기판의 말이 되기 싫어서 나는 장기판을 이탈하기로 했다.
누가 그랬다. 고통받는 나를 구할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고...